어느덧 2월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봄은 아직도 멀리에서 오고 있나 봅니다.
겨울은 역시 욕심이 많은가 봅니다. 봄한테 선뜻 자리를 양보해 주고 싶지 않았는지 겨울 바람은 아직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심술을 부리고 있습니다.
바람도 불고 추운 날씨여서 오늘따라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두툼한 점퍼에 달린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중무장 차림의 행인들만이 옷깃을 바짝 여민 채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저마다 종종걸음들입니다.
"엄마, 날씨가 너무 추운가 봐요.“
은미가 배화점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쳤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살을 에일 듯한 매서운 칼바람이 거세게 불어대고 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웬 바람이 이렇게 심하게 불지?“
엄마도 금방 자라목이 되어 목을 바짝 움츠리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어떠니? 신어보니까 발은 편하니?"
"응, 아주 편하고 따뜻해서 좋아. 그리고 예쁘기도 하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은미가 새로 산 빨간색 털부츠를 내려다보며 마냥 흡적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은미는 지금 생일선물로 부츠를 사기 위해 엄마와 같이 백화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겨울이 다 가긴 했지만 마침 세일을 한다고 해서 엄마가 큰맘 먹고 사 준 부츠입니다.
부츠만 산 게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생각지도 않았던 털모자와 장갑, 그리고 예쁜 머플러도 덤으로 사 주었습니다.
백화점에서 나와 한참 걷다 보니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싸맨 작은 가게들이 마치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즐비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따끈따끈한 호떡을 파는 가게, 군밤과 군고구마, 그리고 김이 펑펑 나는 오뎅을 파는 가게 등, 그런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은미야, 우리 추운데 뜨거운 국물이나 좀 마시고 갈까?“
어느 가게 앞을 지나가던 엄마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가게 안에서는 펄펄 끓고 있는 먹음직스러운 어물 국물에서 연기가 펑펑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입안에서는 어느새 군침이 저절로 돌고 있었습니다.
"응, 그렇지 않아도 마침 나도 먹고 싶었거든.”
은미의 표정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은미와 엄마는 가게 앞에 선 채로 어묵 꼬치를 하나씩 주문했습니다.
가게 아주머니는 어묵과 함께 뜨끈뜨끈한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따라주었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다 보니 금방 추위가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연신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며 조금씩 마시고 있던 은미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찡그린 낯으로 엄마를 툭 쳤습니다.
"엄마, 저 아저씨 좀 봐. 정말 너무 춥겠다, 그치?“
은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웬 아저씨 하나가 시멘트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아저씨의 두 다리는 무릎 아랫부분이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습니다. 얼른 보기에도 끔찍해 보였습니다. 잘린 두 다리는 두툼한 검정색 고무로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아저씨의 맨손은 이미 동상에 걸렸는지 시퍼렇게 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 옆에 있는 낡은 스피커에서는 흘러간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가끔 은미가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부러운 듯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듯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쯧쯧쯧…….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정말 안 됐구나. 어쩌면 좋지?“
엄마도 금세 어두운 얼굴이 되면서 혀를 차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만히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은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나 꼬치 한 개만 더 먹으면 안 돼?“
”네가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그래, 나도 더 먹르려던 참이니까 맘껏 더 먹으렴.“
은미는 얼른 꼬치 한 개를 더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가 무섭게 은미는 갑자기 꼬치와 뜨거운 국물을 들고 아저씨에게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알고 보니 은미가 먹고 싶어 주문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저씨, 이거 좀 잡수세요.“
어느 틈에 아저씨에게로 다가간 은미가 공손하게 음식을 내밀었습니다.
”……?“
아저씨는 처음에는 눈치를 살피느라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너무 고맙다는 듯 은미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가게 아주머니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야아! 천사가 따로 없구나. 요즘 세상에 이렇게 마음씨가 곱고 착한 아이가 있었다니. 네가 어른들보다 낫구나. 아암, 낫고 말고. 난 매일 저런 사람들을 보고도 모른 척해왔는데 정말 부끄럽구나.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 왔지만, 너처럼 인정이 많고 착한 아이는 처음 본다니까.“
가게 아주머니는 은미의 칭찬을 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엄마 역시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런 은미가 그렇게 대견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뒤, 가게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은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네가 정말 장한 일을 했구나. 어떻게 그런 착한 일을 할 생각을 하게 되었지?“
"너무 불쌍해 보이잖아. 엄마, 그런데 그 아저씨 다리는 왜 그래? 정말 너무 불쌍하더라.”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아마 교통사고가 아니면 무슨 다른 일을 하다가 큰 사고가 나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럼 그 아저씨 집은 어딜까? 멀까 가까울까? 그리고 그런 다리로 어떻게 집에 갈 수 있을까?“
은미는 아저씨의 걱정 때문에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날씨가 점점 더 추위지는 것도 여간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저씨는 곧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겁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두 다리가 없는 아저씨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하루 좋이 꽁꽁 언 맨바닥에 엎드려 떨고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자꾸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문득 멀쩡한 부츠가 있는데도 오늘 새로 유행하는 부츠를 사 달라고 졸랐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은미가 다시 무거운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나 이거 괜히 신고 온 거 같아.“
엄마의 두 눈이 갑자기 커다랗게 되어 되물었습니다.
"아까는 마음에 든다고 하더니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아저씨가 자꾸 생각이 나서 그래"
"그 아저씨와 네 부츠하고 무슨 상관인데?“
"만일 이 부츠를 신지 않고 그대로 싸 가지고 왔다면 다시 환불할 수 있었잖아. 그리고 환불받은 돈을 아저씨에게 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서 그래.”
"아니, 뭐라고?“
은미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은미가 다시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소리쳤습니다.
”아참, 그럼 엄마는 먼저 집으로 가고 있어.“
"어딜 또 가려고?”
은미는 엄마의 물음에 대답할 사이도 없이 뒤돌아서더니 오던 길을 향해 급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오늘 아침 아빠가 준 용돈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은미는 지금 그 용돈이라도 아저씨에게 꼭 전해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쌔애앵, 쌔애앵~~~!‘
거세게 불어오는 겨울 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저씨가 있는 곳을 향해 힘껏 달려가고 있는 은미의 마음은 왠지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었습니다. ( * )
※ 꼬치 : 꼬챙이에 펜 음식물
예) 어묵 한 꼬치, 참새구이 두 꼬치 등.
※ 고치 : 누에가 실을 내어 지은 집
예) 자연 관찰 숙제를 위해 플라스틱 상자에 누에와 뽕나무 잎을 담아 왔는데, 놀랍게도 3일 만에 고치를 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