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뜨겁게 달궈 지져다오!(25)

[성삼문(1418~1456)]

by 겨울나무

성삼문이 태어날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

하늘에서 갑자기 세 번이나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성삼문의 부모님들은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서 성삼문(成三問)이란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1447년 문과 시험에 합격한 후, 집현전 학사의 직책을 맡아 일하면서 세종대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그 당시 라오뚱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명나라의 학자 황 찬을 무려 13차례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한 공부를 하고 돌아와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로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문종은 불행하게도 왕위에 오른 지 겨우 2년 만에 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문종은 세상을 떠날 때 김종서 등, 신하들을 불러 놓은 다음 어린 단종을 잘 보살펴달라는 간절한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자리를 탐내고 있던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을 죽인 뒤, 마침내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성삼문은 끓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누르지 못하고 국새를 끌어안고 목놓아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성삼문은 그때 같이 일을 하던 몇몇 신하들을 불러 단종을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왕위에 앉히기로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마침내 명나라 사신 송별 잔치 때에 그 자리에서 의식을 치르기 위해 검을 쥐게 된 그의 아버지 성 승과 유응부가 검으로 세조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날 송별 잔치에서는 검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명이 내려 계획했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은 다시 계획을 뒷날로 미루게 되었다.


그러나 같이 단종 복위 모의에 가담하였던 김 질의 배신으로 모의 사실이 탄로가 나게 되고, 결국 성삼문은 단종 복위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이 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세조에게 직접 심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삼문은 조금도 겁을 내거나 굽힘이 없이 세조를 꾸짖으며 끝까지 반항하였다.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소."


시뻘겋게 불에 달군 쇠막대기로 살을 태우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비웃기도 하였다.


"더 뜨겁게 달구어서 지져다오. 너희들은 어진 임금 잘 섬겨 태평세월 이룩하게나. 난 이대로 죽은 다음 지하로 가서 돌아가신 임금님을 모시겠네.“


그 뒤 성삼문은 모의 동지인 박팽년, 이 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사형되었으니 이들이 곧 만고에 이름높은 사육신인 것이다.

성삼문이 사형을 당하자 그 뒤로 그의 아버지, 세 동생과 네 아들마저 살해되어 역사에 빛나는 충신의 집안으로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참 고 >


난 오래전부터 사육신의 충성심에 대해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육신 묘라도 한번 꼭 찾아가서 참배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수십 년간 묘역 옆을 지나다니면서도 부끄럽게도 이런 저런 핑계로 그러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몇 해 전에 큰맘 먹고 방문을 했으나 아담하게 지은 사육신 역사관 건물은 서 있었는데 개관을 못하고 있었다.


까닭을 물어보니 단종의 복위를 꾀할 때 사육신 외에 또 다른 한 분의 충신이 있었는데 그분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역사관에서는 6면의 사육신만 소개하고 있다고 하여 그 후손들이 그 한 분을 더 소개하지 않았기에 개관을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충분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었다.


만일 그분도 그 당시 모의 활동에 가담한 것이 확실하다면 당연히 그분도 함께 소개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그래서 두 번째 방문을 했을 때에도 아직 개관을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 아쉬운 마음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다시 몇 해 후, 개관을 한다고 하여 다시 찾아가 보게 되었다.


이제는 일이 원만히 해결되어 여섯 분이 아니라 한 분의 충신을 더 넣어서 일곱 분의 충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또 한 분의 충신은 ‘김문기’ 였다.


따라서 지금은 가묘로 충신 김문기의 묘도 사육신의 묘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 뒤늦게라도 후손들이 그런 충신을 찾아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들의 기억에 너무나 익숙하게 각인되어 있는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으로 다시 기억해야만 하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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