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잔 다르크(27)

[유관순(1904~1920)]

by 겨울나무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 출신이다.


그는 1918년 이화 학당 고등과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며, 이듬해 3·1 운동 당시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그 후, 총독부에 의해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천안으로 귀향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돌면서 독립 운동을 앞장서서 지휘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결국,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씨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피살당하고 그날 밤에는 집까지 불을 질렀으며 자신도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유관순은 공주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이를 항소하여 이번에는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재판을 받던 유관순은 법정에서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집어 던진 그는 법정 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계속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다가 모진 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안타깝게도 옥사하였다.



유관순은 이화 학당 보통과 졸업 때 두 권의 선물을 받았다. 잔 다르크와 나이팅게일의 전기였다.

잔 다르크는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백년 전쟁 때 영국으로부터 조국을 구한 프랑스의 16세 소녀였다. 그녀는 철통같은 적의 포위를 뚫고 말을 달려 프랑스를 구한 위대한 인물이다.

두 권의 전기를 읽은 유관순은 크게 감동한 나머지 읽고 또 읽기를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굳게 다짐하였다.


'나도 장차 잔 다르크처럼 우리나라를 구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팅게일과 같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살아가겠다.’


그러던 중 1919년, 그때 유관순은 16세였다. 이제 몇 달만 지나면 고등과 2학년이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공부를 열심히 하며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그날은 1월 22일 수요일이었다. 유관순은 그날따라 친구인 서명학에게 그동안 혼자 가끔 오라가 보았던 뒷산에 같이 가보자고 말했다. 수업이 적은 날에는 시간의 여유가 좀 있었던 것이다.


두 소녀는 신바람이 나서 뒷산 언덕을 올랐다. 그 언덕에 올라서면 서울 장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두 소녀는 장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가슴을 펴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덕수궁을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유관순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저기 좀 봐! 저게 무슨 일일까?"

"그러게 말이야. 웬일로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서 야단들이지?”


아니나 다를까. 그 이튿날 오후, 고종 황제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호외가 곳곳에 너저분하게 뿌려져 있었으며 덕수궁에서는 곡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뜻밖의 소문을 들은 시민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께서 독살당하셨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그게 정말일까?"

"뭐? 황제께서 독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있나?“


장안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듯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어 장례식이 3월 3일로 발표되자 백성들은 날마다 덕수궁 앞으로 통곡을 하곤 하였다. 그 비통한 울음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비명에 세상을 하직한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크나큰 원한을 품고 있던 백성들의 결심은 하나로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눈치를 보며 비밀로 모임을 갖곤 하던 독립지사들은 그 일로 인해 마침내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더욱 무섭게 활할 타오르고 있었다.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은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와 아울러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서도 작성하였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 위원에게 보내는 독립 선언 의견서를 만드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런 다음 인쇄소에서 밤을 새워 찍어 냈다.


일만 장이나 되는 독립 선언서는 연희, 보성학교 등 학생 대표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리고 그 학생들은 각자 책임을 지고 독립 선언서를 여기저기 뿌리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쿄와 상해에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각계의 대표들은 재동 김상규네 집에 모여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선언문의 발표는 고종 황제 장례 날을 이틀 앞둔 3월 1일로 정하였다. 각 지방에도 비밀히 연락하여 함께 거사를 치루기로 약속하였다.

< 유관순생가 >


그때, 유관순은 이화 학당에 재학 중인 친구 6명과 함께 은밀한 곳에서 만나 모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친구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러나 힘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나라가 이 모양인데 우리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니? 왜놈들이 우리 나라 백성들을 못살게 굴다 못해 이제는 임금까지 독살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느냔 말이야.”

유관순의 이야기를 들은 서명학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그래, 우리 결사대를 조직하는 게 어떻겠니? 그래서 어른들의 독립운동을 돕는 게 어떻겠니?“

”그래 그게 좋겠다!“


의견일치를 보게 된 여섯 소녀는 유관순을 따라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다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곧 큼직한 종이에 붓으로 큼직하게 각자의 이름을 쓴 다음 서명하고 도장도 찍었다.


국현숙, 유관순, 김희자, 유점선, 김분옥, 서명학.


유관순은 이때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혈서를 쓰고 싶었으나 다른 친구들을 생각한 나머지 혈서만은 참고 넘어갔다.


”우리 그럼 이번에는 각자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내놓기로 하자.“

그들은 각자 주머니를 털어냈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모두 합해 보니 22전이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맨 먼저 태극기를 만든 다음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하였다. 애국가도 등사하여 속옷 주머니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우리 민족 대표 33인은 인사동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우렁차게 만세를 불렀다. 이와 같은 시각, 파고다 공원에서는 각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 5천여 명이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힘껏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

"대한 독립 만세 !“


만세를 외친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태극기를 둘고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국민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렸다. 성난 파도와 같은 함성은 땅을 흔들고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 학당 여섯 소녀 결사대도 교장이 말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급생들을 따라 뒷 담을 넘어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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