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YMCA 중학부를 졸업하였고, 1915년에는 조선 정악 전습소를 졸업한 후 그곳에서 서양악부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8년에는 일본 우에노 음악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귀국한 후, 1920년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담은 '봉선화' 를 작곡했다.
1922년에는 음악 단체인 '연악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시 1926년, 일본의 도쿄 고등 음악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 뒤 도쿄 교향악단의 제1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어 연주 생활을 하다가 졸업과 동시에 귀국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관련 잡지인 음악계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어 1931년에는 현제명과 같이 조선 음악가 협회를 조직하였고, 그다음에는 이화 여자 전문학교 경성 보육 학교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0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관현악단을 조직하는 등, 서양 음악의 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한평생을 오직 음악에 몸 바쳐 노력한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 등의 동요가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민족의 설움이 담긴 ‘봉선화’
그가 작곡한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 그리고 슬픔이 담긴 노래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두 번째로 일본으로 가서 전에 다니던 우에노 음악 학교에 다시 입학하려고 하자 학교 측에서는 그가 잠깐 독립운동에 가담한 경력이 있다고 하여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나라를 잃은 설움과 분함을 달래기 위해 24세에 작곡한 노래가 바로 ‘봉선화’였던 것이다.
이에 일본 경찰들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 뒤, 일제 말기에 서울의 부민관에서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에 인기가 높았던 가수 김천애가 하얀 한복을 입고 나와 프로그램에도 없는 이 ‘봉선화’를 부르게 되었다.
뜻밖의 ‘봉선화’를 듣게 된 관중들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으며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임석했던 일본 경찰은 곧 그를 연행해가는 소동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봉선화’는 그 뒤로도 우리 민족들이 왜놈들의 눈을 피해 계속 몰래 불리워졌던 우리 민족의 한과 설움이 담긴 노래였던 것이다. 지금은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곡이 되었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