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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l 10. 2020

꼬마 흡연가

[헛배를 낫게 하려면]

밀고 밀리는 치열하고도 참혹한 전쟁이 연일 그치지 않고 이어지고 있던 6.25 전쟁 당시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굶주리고 허기진 배를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 총알이나 폭격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그런 세월이었다. 그러나 피란민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족들과 함께 잠을 자고 살아갈 잠자리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고향 마을은 천연적으로 사방이 나지막한 산으로 마치 삼태기 모양을 하고 둘러싸여 있어서 그 어느 마을보다 특히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들곤 하였다. 아마 마을 생김새가 아늑하게 산으로 감싸고 있어서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마을은 양쪽으로 산이 둘러싸인 속에 마을 한가운데는 제법 큰 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논들은 모두가 기름진 천수답이어서 벼가 잘 자라서 누구나 탐을 내는 이른바 고래 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논의 양쪽으로 5, 60채의 초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피란민들은 대부분 우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적성이나 임진강 건너 장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평양과 황해도에서 온 사람, 그리고 서울에서 우리 마을로 피란을 와서 휴전이 될 때까지 살다가 간 사람들도 있었다.        


난리 통에 피란민들이 임시로 기거할 방을 얻는 방법은 다양했겠지만, 알고 보면 간단했다. 우선 어느 집에 빈방이 있는지를 알아본 다음 빈방이 있는 그 집을 찾아가서 같이 좀 살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이 되곤 하였다.      


집주인은 피란민들의 인상이나 가족 수 등을 간단히 물어보고 일단 어느 정도 마음에 들면 방을 내주게 되는데 그때 계약서라든가 그 밖의 어떤 절차 같은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구두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냥 빈방에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요즈음에서 남의 집에서 돈 한 푼 주지 않고 단 하룻밤을 잠을 잔다는 것조차 어림도 없는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때는 방을 구할 때 계약서라든가, 사글세라든가 전세라는 말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그저 심하게 불편하지 않는 한, 싫증이 날 때까지 그냥 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집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작고 옹색한 집이긴 하였지만,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사랑방까지 방이 모두 세 개였다. 그래서 방마다 한 가구씩 들어와서 세 가족이 한 지붕 밑에서 휴전이 될 때까지 3년 내내 함께 살았다. 


그런 것은 비단 우리 집만이 아니었다. 다른 집들 모두 다 그렇게 인심 좋게 서로 도우며 별 무리없이 살아갔던 것이다. 특별히 인심이 좋아서가 아니었. 그땐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지만 어쩌다 혹시 꿀꿀이죽이나 그 밖에 먹을 것이 좀 생기면 나누어 먹기도 하면서 서로 끈끈한 인정을 베풀며 살아갔다.       


그런데 한 집에서 세 가구가 살아가는 것은 그래도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그 당시에는 자주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 중이어서 군인들은 그들이 기거할 부대가 따로 없었다. 따라서 국군들이 우리 마을을 점령하게 되면 국군들이 밤만 되면 집집마다 몇 명씩 들어와서 식구들 틈에 끼어 같이 잠을 잘 때가 많았다. 그리고 시렁이나 횃대에는 온통 군인들의 무기인 수류탄이나 탄창 수통 등 군용품이나 무기들이 주렁주렁 무겁게 매달려 있기도 하였다. 그런 것은 비단 국군뿐만이 아니었다.     

 

국군이 후퇴하여 남쪽으로 밀려내려가게 되면, 그리고 인민군들이 반격을 해오면 인민군이나 중공군들이 쳐들어와서 그들도 마찬가지로 밤이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식구들과 어울려 그 좁은 방에서 같이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러니까 그때 어느 집이나 우리 국군은 물론이고 인민군과 중공군까지 아무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동 합숙소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동네에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야릇한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동네 어떤 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다닌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도 이제 겨우 다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녀석이 담배를 피우고 다닌다니 신기하면서도 큰 화젯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것이 그것도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다섯 살짜리가 담배를 피우고 다닌다는 소문의 장본인은 장단에서 피란을 나온 사람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은 그 소문이 사실인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 가끔 그 집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마침내 그 녀석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마당가에 혼자 앉아 소문대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손에 소중히 들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담배였다.      


기침을 하거나 인상을 조금도 찌푸리지도 않고 태연히 담배를 열심히 빨며 연기를 펑펑 뿜어내고 있었다. 우린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 되어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너 그 담배 왜 피우고 있는 거니? 그리고 아빠나 엄마한테 야단맞으면 어쩌려고?”     


그러자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뜻밖이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아부지가 자주 피우라고 했단 말이야.” 

“뭐, 뭐라고? 니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라고 했다고?”     


우리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서로 얼굴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담배도 아주 귀했던 시절인데 그 귀한 담배를 어린아이에게 피우라고 했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는 평소에 헛배를 자주 앓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헛배를 낫게 하려면 담배를 자주 피우라고 그의 아버지가 권했다는 것이었다. 무지했던 시절이어서 그 담배가 약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헛배를 앓고 있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소위 헛배를 앓는다고 하는 것은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괜히 배가 불룩하게 나오거나 입맛이 없어서 밥을 못 먹게 되는 증상을 보이는 병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아이도 더러 있었다.   

   

그 아이를 보게 되자 우리들은 담배를 피워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워낙 담배가 귀했던 때여서 담배를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호박잎이었다. 호박잎으 따서 바짝 말린 다음 손으로 곱게 비벼 가루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아무 종이에 싸서 잘 말은 다음 불을 붙이고 힘썩 빨아보았다.   

     

“우엑, 퉤에엣!”     


호박잎 담배를 빨아보자마자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구역질을 해대고 침을 열심히 뱉아내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쩔쩔매고 있었다. 호박잎 담배를 입으로 빨자마자 확 불꽃이 일어나며 훨훨 타고 있었다. 


입안으로 들어간 연기는 어찌나 독한지 혀가 금방 갈라질 것처럼 아팠다. 한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호박잎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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