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나무 Jul 29. 2020

구름 다리 붕괴 사건

[6.25 피란 이야기 (2)]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한동안 평온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또 다시 불안해진 표정으로 웅성거리며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피란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하던 날이었다.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좀 편히 지낼 수 있으려나 했던 기대가 다시 물거품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실망의 빛이 가득했다.    

   

“인민군들이 또 쳐들어온대요!“

”뭐라고? 그럼 그놈의 지겨운 피란 보따리를 또 싸야 하잖아? 이거 어쩌면 좋담!“     


마을 사람들은 이제 피란이란 소리만 들어도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거듭해서 밀고 밀리는 전쟁으로 인해 자주 그 지긋지긋한 피란 생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국군과 미군들은 이미 서둘러 후퇴를 하고 있었다. 죽기 싫으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다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삿짐을 챙기듯 다시 서둘러 피란 짐을 싸기 시작했다.      

피란민의 행렬을 보면 그 모습이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지게에 이불이며 솥 등, 짐을 잔뜩 싣고 지고 가는 사람, 그런 지게 짐보따리 위에 어린 자식을 올려놓고 지고 가는 사람, 아기를 등에 업고 양쪽 손에는 무거운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아낙네들, 어디 그뿐이랴. 그렇게 무거운 짐을 운반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머리 위에도 또 짐을 이고,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말 그대로 남부여대였다.      


그때, 그나마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자기 가족들을 잃지 않으려고 가족들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어미를 따라가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무거운 짐보따리를 잔뜩 머리에 이거나 들고, 등에 진 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짐이 워낙 무거웠기 때문에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정처 없이 그렇게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짐이 무겁고 힘이 들어도, 그리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걸을 수가 없어도 그냥 무작정 걸어야만 했다. 꾀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란을 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피란을 가다가 잠깐 길바닥에 주저앉아 쉴 때는, 그리고 허기를 견딜 수 없을 때는 집에서 떠날 때 급히 만든 주먹밥을 아껴 베어먹곤 하였다. 주먹밥은 주로 보리밥에 맛소금을 조금 뿌려서 둥글고 단단하게 뭉친 밥 덩어리였다. 그것이 가족들의 끼니를 이어갈 소중한 생명줄이었다.     


젖을 얻어먹지 못한 아기들은 벌써부터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엄마 등에 업힌 채 계속 칭얼거리며 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도 제대로 끼니를 채우지 못하고 굶은 지 오래이니 젖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러기에 아기의 배를 채워줄 방법이 없으니 그저 속만 시꺼멓게 탈 일이었다.      


한참 걷던 중에 어느 마을에 도착해 보니 집집마다 이미 불이 나서 무서운 화염에 싸여 훨훨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가집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쩌다 기와집이 탈 때는 시뻘겋게 달구어진 기왓장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날아갔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무서웠다.      


불이 난 것은 우리 국군들이 후퇴를 하면서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 마을뿐만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집은 모두 불이 붙은 채 무섭게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게 된 이유는 적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혹시 집에 들어가서 숨으면 발견하기가 어려워서였다. 혹시 집안에 들어가 숨어 있으면 그 집안에 적군이 숨어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없어서 폭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을 지르는 것은 적군들이 후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뒤쪽에서는 여전히 적군들이 진격을 해오며 쏘아대는 총소리들이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남쪽에서도 국군들이 후퇴를 하면서 가끔 적군을 향해 쏘아대는 대포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 총소리와 대포 소리, 그리고 비행기 폭격 소리에 너무나 익숙해진 피란민들은 언제 그 총알이나 대포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은 위험한 상황이 매일 이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지게 위에 올라앉아 있던 어린아이가 비행기 폭격에 맞아 그 자리에서 바로 굴러떨어지면서 죽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피란을 가던 마을 사람들 중에도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피란을 가던 마을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경우를 가리켜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피란길에 오른 우리 마을 사람들이 쉬었다 걷기를 거듭한 끝에 늦은 오후에 겨우 도착하게 된 곳은 어느 커다란 다리 밑이었다. 그때 몹시 지치고 지친 마을 사람들은 마침 다리를 보자 그 밑에 짐을 내려놓고 잠깐 쉬어가기로 하였다. 때마침 가랑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비를 긋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우리 식구들도 그 다리 밑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일단 짐을 내려놓았다. 우리 식구라야 모두 네 명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누님, 이렇게 달랑 네 명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던 시절임에도 우리 부모님은 달랑 우리 남매만 두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가끔 마을 사람들에게 장난스러운 놀림을 받기도 하였다. 비둘기 고기를 구워 먹은 게 아니냐고…….     


난 그때 겨우 초등학교 재학 중이었다.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부모님들은 나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셨다. 내겐 피란 짐을 절대로 지지 않도록 특별 배려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피란짐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짐이라고는 학교에서 배우던 교과서와 필기도구가 가방에 메고 다닌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난 그 당시 초등학교 재학 당시에 받은 통지표와 우등상장을 지금까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오래 보관하고 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우리 마을 사람들이 쉬고 있는 그 다리는 수색역 부근에 위치한 속칭 ‘구름다리’라고 하였다. 그 다리 밑으로는 경의선 철로가 길게 벋어있었다. 다리 위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큰 도로였다.         


과거에는 그 구름다리를 경계로 남쪽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상암동이었고, 그 반대쪽은 경기도 고양군이었다. 그리고 그 후 상암동은 서울특별시 마포구로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4, 50명쯤 되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피곤하고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벌렁 눕거나 혹은 앉은 채로 한창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부릉, 부르르릉…….”     


다리 위에서 갑자기 이상한 자동차 소리를 내면서 다리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동차 한번 구경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자동차 소리에 호기심이 생긴 아이들이 모두 다리 밑 양쪽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는 이상하게 생긴 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보며 신기한 듯 넋을 잃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마냥 그렇게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동차는 얼른 보기에도 지금까지 보아왔던 예사로운 자동차가 아니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마 트랙터였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난생처음 보게 된 자동차였다. 전쟁통에 무슨 일로 그런 차가 그 다리 위를 통과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운전을 하는 사람이 군인이었는지 민간인이었는지도 지금도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트랙터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 어머 사람의 걸음걸이보다 더 느렸던 것 같다. 차의 속도가 그렇게 느린 바람에 더 자세히 오랫동안 구경할 수 있어서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그 차가 다리 중간쯤 왔을 때 그만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리에서 ‘우지직, 우지직’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다리 중간이 그 차와 함께 천천히 주저앉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우지직 소리가 가바기 더 요란스럽게 들리는가 했더니 구름다리는 마침내 순식간에 그 중간이 자동차와 함께 기찻길로 ‘V’자 형으로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문득 생각난다. 콰이강의 다리가 무너질 때는 그 아래가 강이었지만, 구름다리 아래는 기찻길인 것만 다를 뿐이었다.  

    

다리가 그렇게 요라스러운 굉음을 내면서 무참히 무너져내리자, 다리 밑은 온통 흙먼지로 뒤덮이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한동안 한치의 앞도 구별할 수 없었다. 다리 위가 시멘트 포장이 아닌 흙으로 포장된 도로였던 것이다.    

    

“엄마아--! 어디 있어?”

“××야! 엄마 여기 있어!”

“아빠아!”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미친 듯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자기 식구들을 찾아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 이리저리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흙먼지가 가라앉고 앞을 분간할 수 있게 되자 마을 사람들 중에는 다리가 무너질 때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면서 죽으나 사나 다시 피란길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다행히 다친 사람 하나 없이 무사하게 살아남았는데 그놈의 이불 보따리가 문제였다. 지게에 올려놓고 지고 다니던 이불이었다. 그런데 그 이불이 그만 다리가 ‘V’자 형으로 내려앉으면서 “V’자 밑에 깔리고 만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이불을 잡고 아무리 빼내려고 힘을 싸보지만 워낙 다리에 심하게 깔린 이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버지가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강한 막대기 하나를 얻어왔다. 그리고 이불 밑에 있는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실랑이를 한 뒤에야 겨우 다행히 이불을 무너진 다리에서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불보따리를 지게에 지고 막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으음~~ 으으음~~~“     


어디서 가느다란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여오는 것이 아닌가. 신음 소리를 따라 여기저기 살펴보니 아아, 그곳에는 바로 우리 옆집 아주머니가 쓰러진 채 신음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무너질 때 다리에 그만 머리를 맞았던 것이다. 아주머니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옆에는 열 살 쯤 된 아주머니의 딸이 갓난아기 동생을 업고 아주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훌쩍이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다가가서 아무리 흔들어 보았지만 아주머니는 의식이 거의 다 나간 것처럼 말도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하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마을 사람들이 이미 다 떠나고 다리 밑에는 오직 그 아주머니와 딸 그리고 우리 식구들 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빨리 피란은 가야 하는데 아주머니를 그대로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갈등을 하면서 망설이던 끝에 어대론가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달려간 곳은 구름다리 위였다. 그때 마침 국군들이 구름다리 옆길을 따라 줄을 서서 후퇴를 하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사람이 막다른 일에 다다르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했던가. 아버지는 국군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구원을 청했던 모양이다.   

     

잠시 뒤에 위생병이라고 쓴 완장을 두른 국군 두 명이 고맙게도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급히 내려왔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더니 재빨리 응급처치를 하더니 붕대로 머리를 잔뜩 감아주고는 다시 급히 그들의 대열을 따라 달려갔다.     


”아마 이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위생병들이 응급처치를 해준 뒤에 남기고 간 말이다. 이제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이렇게 심하게 머리를 다쳐서 정신까지 잃은 사람을, 게다가 조금도 움직이기가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버지가 이번에는 근처에 있는 어느 집 울타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울타리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를 하나 잘라왔다. 연장이 없어서 제대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임시 지팡이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는 그 아주머니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지팡이를 손에 쥐어 주었다.    

  

아주머니는 다행히 지팡이를 짚고 한 발 한 발 조금씩 내딛고 있었지만 오죽했으랴. 지팡이를 짚은 반대쪽 팔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번갈아 가면 부축을 해가면서…….      


아버지는 지게에 짐을 잔뜩 진 상태에서, 그리고 어머니는 머리에 짐을 이고, 손에는 무거운 짐보따리를 들고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쓰러져가는 사람을 부축하고 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아직도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고 보니 그게 바로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제발 날 버려고 그냥 가도록 해요.“       


아주머니는 걷기가 너무 힘이 들고 고통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가끔 이런 말을 되뇌곤 하였다.  


하지만 우린 그대로 부축을 해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쉬고 조금 가다가 다시 쉬기를 반복하다 보니 가까운 거리를 가기에도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조금씩 걷다 보니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둡기도 했지만, 이제는 환자도 환지이지만 모두가 지치고 지쳐서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 외딴집 한 채가 보였다. 빈집이었다. 우린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 우선 아주머니를 아랫목에 편안히 눕히고 난 다음 빈 집 여기저기를 뒤져서 저녁밥을 간단히 준비하여 요기를 했다.     


 아주머니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듯 계속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급히 마련해서 떠 먹여주는 죽을 조금씩 받아먹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어느새 이튿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우린 다시 피란을 서둘러야만 했다. 북쪽에서는 계속 적군들이 진격해 오고 있는 총소리들이 여전히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제 절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며 그 집에 남아있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같이 가보자고 하였지만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며 완강히 거절하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랬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우린 할 수 없이 며칠 분의 양식거리를 마련해 놓은 뒤 어린 딸에게 당부하게 되었다. 장만해 놓은 음식들을 엄마와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부디 간병 잘 해드리라고, 그리고 명이 길어 살아나게 되면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만나보자고……. 이렇게 가슴 아픈 생이별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야말로 지금 생각해 봐도 눈물겹고도 가슴아픈 추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우린 인천까지 피란을 가서 약 석 달 정도 힘든 피란 생활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석 달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동안 어쩌면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 아주머니가 무사히 멀쩡하게 살아서 우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몹시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리가 무너질 때 다친 그 아주머니를 우리 식구들만 남아서 그만큼 도와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 다 죽어가는 사람을 빈 집에 달랑 남겨두고 혼자만 피란을 갈 수 있었느냐며, 그리고 너무 서운하다면 우리 집으로 와서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따지며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도 그 아주머니 말대로 잘못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달라고 한다더니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덤터기를 쓰게 될 줄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구름다리 밑에서 죽거나 살거나 못본 체하고 그냥 우리끼리만 갔을 것을……. 

     

때로는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질긴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 아주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게 90세까지 장수하다가 운명하였다.( * )       

매거진의 이전글 국경을 두 번이나 넘은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