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작동화

얼룩진 운동회

by 겨울나무

오늘은 학교에서 그동안 오랫동안 연습해 온 운동회 총 예행연습까지 마친 날입니다. 운동회 예행연습을 끝낸 희정이는 가벼운 기분으로 집을 향하여 종종 걸음을 옮겨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찍 집으로 돌아가 보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오전 공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매일 운동회 연습을 하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해온 희정이입니다.


’오늘은 할머니보다 먼저 집에 가서 저녁밥을 지어야지!‘


전에는 매일 할머니버다 집으로 먼저 가서 저녁밥을 미리 지어놓곤 했던 희정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운동회 연습 때문에 매일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편안히 앉아서 먹기만 하고 학교에 다니곤 했던 희정이였습니다. 매일 운동회 연습 때문에 땅거미가 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야 연습이 끝나곤 했기 때문에 잠시라도 할머니를 도울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희정이와 마찬가지로 요즈음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몹시 바쁩니다. 다른 할머니들 같으면 지금 한창 손자나 손녀를 데리고 놀아 주기에도 힘든 나이에 매일같이 논밭으로 쏘다니며 남의 집 일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희정이는 할머니가 새삼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 내일 운동회 구경 가시려면 오늘은 좀 쉬셔야죠.“


“아암, 내일은 열 일 젖혀 놓고 희정이네 학교 운동회 구경을 갈 생각이니 할미 걱정은 말고 네나 어서 학교에 다녀오렴. 에이구, 우리 희정이 참 착하기두 하지.”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도 아무 걱정 말라는 듯 희정이의 등을 두르려 주고는 부리나케 품팔이를 나가셨습니다.


희정이가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어느 틈에 들판을 지나 밤나무가 우거진 산고갯길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새빨갛게 알밤이 벌어진 밤나무마다에서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알리기라도 하듯 산매미들의 요란한 합창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옵니다.


희정이는 문득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들판을 바라봅니다. 들판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벼이삭들이 바람결에 따라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새를 쫓는 농부들의 고함 소리가 온 들판을 흔들어놓고는 높고 푸른 하늘로 멀리멀리 번져갑니다.


“할머니, 오늘은 어떻게 벌써 오셨어요?”


어느 틈에 대문 앞에 다다른 희정이는 이상한 느낌에 큰소리로 할머니부터 불러 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 분명히 잠가놓고 간 대문이 조금 열려 있는 걸 보면 느낌이 좀 이상합니다.


’어엉? 할머니가 이렇게 일찍 오실 리가 없는데……!‘


희정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급히 방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희정이가 온 모양이구나?”


그때, 방문이 반쯤 열리면서 할머니의 힘없는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희정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가 방에 누운 채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신음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할머니, 어떻게 된 일이세요?”


희정이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얼른 방으로 들어가더니 할머니의 손목을 잡고 물었습니다.


“글쎄다. 내일 운동회 구경만은 꼭 가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이놈의 몸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구나.”

“아냐요. 할머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가실 수 있어요. 그리고 꼭 가셔야 된다니까요.”


"아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냐만 몸이 이렇게 말을 듣지 않으니 어디 갈 수 있겠니? 할미가 가야 우리 희정이가 신이 나서 뜀박질도 잘 하고 춤도 잘 출 텐데.”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할머니의 눈에서는 어느새 이슬이 맺히고 있었습니다. 희정이도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누워 있는 할머니 품에 매달리며 흐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안 돼요. 그래도 할머니는 꼭 가보셔야 해요. 흐흐흑…….”


할머니는 이제 겨우 예순 살이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얼굴은 온통 주름살이 쪼글쪼글하면서도 새까맣고 비쩍 말랐습니다. 그리고 광대뼈만 보기 싫게 툭 불거지고 움푹 패였습니다.


희정이는 할머니의 몸이 그렇게 쇠약하게 된 것은 그 모두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즈음 공연히 할머니를 괴롭혔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운동회날을 약 보름 앞둔 어느 날 학교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무용을 담당한 선생님이 5,6학년 여학생들을 모야 놓고 부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운동회 때 우리 학교에서는 고전무용인 부채춤을 프로그램에 넣기로 했어요. 좀 어렵긴 하겠지만 여러분들은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빨간 치마와 흰 저고리, 그리고 족두리와 부채를 준비해야 되겠어요. 날짜가 없으니까 하루라도 빨리요. 알겠죠?”


“네!”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일제히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희정이도 무용을 하다는 말에 이만저만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희정이가 그렇게 기뻐하게 된 것은 평소에 남달리 무용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오전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넒은 운동장에서 부채춤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2,3일이 지나자 성급한 아이들은 벌써부터 새로 사온 저고리와 치마 등 한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무용 연습에 열중하였습니다.


희정이도 집이 가난한 것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조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빨리 무용복 좀 사 주세요. 다른 아이들은 벌써 많이 입고 연습을 한단 말예요.”

“암, 사줘야 하고 말구. 그런데 희정아, 며칠만 더 기다려다오. 이 할미가 몸을 팔아서라도 예쁜 한복을 사다 줄 테니 말이야, 알겠지?”


희정이는 며칠째 할머니에게 보챘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늘 며칠만 더 기다리라며 다음으로 미루곤 하였습니다.


희정이가 조를 때마다 할머니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가슴이 머어질 정도로 몹시 괴롭고 언짢았습니다. 엄마 아빠 없는 단 하나뿐인 손녀딸을 남보다 잘해 주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을 받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할머니입니다.


그러기에 할머니는 매일 품팔이를 다니면서도 동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돈 얘길 꺼내곤 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빌려주는 사람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울 쉬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희정이는 할머니의 그런 속도 모르고 할머니의 속도 모르고 매일 할머니를 졸라대고 있었습니다. 운동장 가득 하늘을 가리고 펄럭이는 만국기들, 그런 만국기 아래에서 펼쳐지는 달리기와 무용 등, 자신의 자랑스러운 여러 가지 모습을 할머니에게 마음껏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복.png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할머니, 모래까지 무용복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은 무용을 할 수 없게 된대요.”


희정이의 설명을 들은 할머니의 가슴은 그만 철렁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마치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였습니다.


“아, 알겠다. 여태까지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우리 희정이가 무용에서 빠지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소리니? 내일은 할머니가 꼭 사다 주기로 약속을 하마. 아암, 이게 누구 손잔데 사다 줘야 하고말고.”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며 희정이를 꼬옥 껴안았습니다. 할머니의 시원스러운 대답 소리를 들은 희정이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활짝 웃는 얼굴이 되어 할머니에게 다급하게 되물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어요, 할머니?”

“아암, 정말이고 말구. 할미가 꼭 사다 줄 테니 넌 아무 걱정마라.”


할머니의 자신있는 대답 소리를 들은 희정이는 너무나 기쁨에 넘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할머니의 괴로워하는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좋아서 여전히 껑충껑충 뛰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희정이는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할머니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정말 한복 사 오신 거죠?"

“아암, 사 오고 말고, 예 있다. 잘 맞는지나 모르겠구나. 어서 입어 보렴."


할머니는 윗목에 있는 작은 장롱을 열더니 새로 사온 한복을 꺼내 놓았습니다. 한복을 본 희정이의 입이 금방 쩍 벌어집니다. 할머니가 내놓은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족두리와 부채는 그 누구의 한복보다 더 곱고 예뻐서 희정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리고 맞춘 것처럼 그렇게 몸에도 꼭 맞고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때? 네 마음에 드니?”

“네, 정말 너무너무 멋이 있어요.”


“아마, 제일 비싼 옷감으로 사온 것이니까 모르긴 해도 다른 아이들이 입은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좋아 보일 거다.”


가슴속에서 복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한 희정이가 이번에는 치마 저고리를 입은 채 할머니를 부둥켜안은 채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하였습니다.


“얘얘, 어지러워 쓰러지겠다. 그만 좀 하렴. 호호호…….”


할머니가 어지럽다고 하는 바람에 그제야 희정이는 부둥켜안고 있던 할머니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아시 당부를 하였습니다.


“할머니, 내가 이 예쁜 치마와 저고리 입고 내일 무용을 잘 할 테니 할머니도 이번 운동회 구경 은 꼭 가서야 돼요, 알았죠?”

“아암, 가야하고말고. 우리 희정이가 무용을 하는데 이 할미가 안 가면 누가 기겠니?”


희정이는 정말 이번 운동회 때는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달리기랑 부채춤을 추눈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자랑 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요. 운동회 구경을 꼭 가보겠다고 그렇게 입버릇처럼 약속하던 할머니가 이제 운동회를 하루 앞두고 그예 병이 나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옆에서 훌쩍이고 있는 희정이를 향해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무거운 입을 열었습니다.


“얘, 희정아, 너 엄마 아빠 있는 아이들이 몹시 부럽지?”

“……?”


희정이는 뜬금없이 꺼낸 할머니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할머니의 얼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할미도 네 속을 다 알고 있단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이 할미만을 의지하며 아무 불평 없이 지내온 네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할머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할머니는 괴로운 듯 한동안 말을 끊었다가 희정이의 손을 꼬옥 잡으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이 얘긴 내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일 저녁에는 마침 너의 애비 제사란다. 난 너의 애비한테도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단다. 지금까지 너의 애비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로 따뜻한 밥 한 그릇 못 떠놓고 세월만 보낸 못난 할미였지. 그러다가 이번에는 제사라도 한 번 꼭 지내줘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희정이는 갑자기 하늘나라로 간 아빠의 인자했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새삼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에 어깨까지 들먹이며 흐느꼈습니다.


“이번에 사다 준 네 한복은 바로 너의 애비 제사 때 쓰려고 내가 그동안 푼푼이 모아 아껴 두었던 돈으로 사오게 된 것이란다. 네 무용복은 우선 어디서 빌려서라도 해결하고 제사는 꼭 지내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더구나. 이제는 제사도 운동회 구경도 모두 틀려 버린 것 같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니. 흐흐흑…….”


"할머니, 이제 그만! 그만 좀 하세요. 흐흐흑…….”


희정이는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벅차오르는 감종을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만 하마. 할미가 이젠 망녕이 들어 이제 너한테까지 못할 말을 늘어놓게 된 모양이구나. 그래, 알았다. 그만해야 하고말고.”

“…….”


희정이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다시 할머니 품에 덥석 안겨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공연히 할머니를 괴롭혀가면서 아빠의 제사도 못 지내게 되었다는 생각에 제 자신이 몹시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라. 우리 희정이 배고플 텐데 저녁 먹어야지. 오늘 내가 일하던 집에서 얻어온 밥이 솥에 있으니 어서 꺼내다 먹으렴, 응?”


그러나 희정이는 지금 배가 고픈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할머니 옆에서 흐느끼다가 그쳤을까? 울음을 그치고 멍청히 앉아 있던 희정이의 귀에 저녁을 먹으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제 소연인 대답조차 못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앉은 채 멍청한 표정으로 천장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희정이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엄마 아빠의 손목을 잡고 어린이 대공원이나 바닷가로 다니면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 지금 희정이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앉아 진심으로 용서를 빌며 마음속으로 슬피 울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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