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나무 Sep 19. 2020

방공호 이야기 (1)

[6.25 동란 때의 방공호 이야기]

6. 25 동란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 마을에 인민군들이 쳐들어와서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이른 새벽부터 마을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떠들고 있는 소리가 우리 집 울타리를 넘어 시끌벅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새벽의 단잠을 깬 우리 식구들은 무슨 일로 그러는지 궁금한 생각에 귀를 있는 대로 쫑긋 세웠다. 두런두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뭐어? 교남(가명)이가 죽었다고? 아니 왜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거야? 그럼 인민군들한테 들켜서 총에 맞아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교남이는 우리 마을 청년으로 열 예닐곱 살쯤 된 청년이었다.     

 

“그게 아니래. 오늘 새벽에 아주머니(교남이 어머니)가 그놈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밥을 싸 가지고 방공호로 갔었다지 뭐야.”     

“그래서? 그 아주머니 늘 그래왔잖아?”


“그랬더니 글쎄 그 애가 오늘 새벽엔 방공호 속에 쓰러진 채 꼼짝을 하지 않더라지 뭐야.”     

“ 워언, 저런 변이 다 있나. 쯧쯧쯧……. 그래서?”


“ 아마 자세한 건 아직까지 잘 모르긴 해도 가스 중독으로 죽었다나 봐.”

“ 허허, 그거 아까운 청년을 하나 또 잃었구먼그려. 쯧쯧쯧……. ”  

    

교남이는 우리 마을 건너편 나지막한 산길 옆에 방공호를 파고 그 속에 숨어 살고 있었다. 말만 방공호지 산길 옆 언덕에 삽으로 구멍을 내서 겨우 사람이 하나 들어가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허름한 굴이었다. 교남이가 혼자 그렇게 그 굴속에 숨어서 살아온 지도 벌써 몇 달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소문을 듣고 보니 교남이가 죽게 된 것은 추위 때문이었다. 굴속이 너무 추워서 견디다 못해 숯 몇 덩이를 가져다 굴속에서 불을 지피다가 그만 가스 중독으로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교남이가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된 것은 그 웬수 같은 인민군들 때문이었다. 그때는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도 보이는 대로 잡아다가 의용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인민군들한테 끌려가기가 일쑤였다.      


우리 마을에서는 실제로 그 당시에 청년 두 명이 의용군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모들은 이제나저제나 하고 애를 태우며 자식이 돌아오기를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을 다해 빌며 기다려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의 부모들은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모른 채 자식을 영영 만나보지 못한 가슴아픈 한을 품은 채 이미 운명을 달리한 지 오래이다.     

   

결국, 교남이도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굴속에 숨어 살다가 그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참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이나 방공호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면사무소에서도 수시로 방공호를 파고 들어가서 숨어서 살라는 지시를 내리는 햔편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방공호를 제대로 파놓았나를 파악하기 위해 수시로 점검을 하기도 하였다.      


말이 방공호지 그때 파놓은 방공호는 겨울에 무나 배추를 겨우내 보관하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와 비슷했다. 우선 겨우 식구들의 몸만 들어가서 지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땅을 깊이 팠다.      


구덩이 위에는 무나 배추를 보관할 때처럼 이리저리 너스레를 걸쳐 얹어 놓고 그 위에 흙을 흡사 공동묘지의 무덤처럼 두껍게 덮어 쌓았다. 그리고 비행기의 폭격이 있을 때마다 그 방공호 속으로 얼른 들어가서 숨곤 하였다.      

방공호란 원래 적의 공중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땅속이나 산속에 파놓은 굴이나 구덩이 따위의 시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 마을에 파놓은 방공호는 말로만 방공호였지 만일 포탄이 떨어지거나 총으로 쏴도 그 속에 있다가 모두 죽게 될 것이 뻔할 정도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방공호였다. 그야말로 눈만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그렇게 몸만 숨기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끔 며칠째 비행기 폭격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을 때는 그 무나 배추 구덩이 같은 방공호 속으로 식구들 모두가 이불만 가지고 들어가서 지낼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 배가 고프거나 급한 볼일을 볼 때가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언제 폭격을 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 대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공호 바닥은 짚으로 두껍게 깔고 이불을 덮기는 했지만, 땅굴을 판 구덩이 벽에서는 얼었던 흙이 녹으면서 흙물이 되어 줄줄 흘러내리기도 하였다. 바닥은 아무리 짚으로 두껍게 깔아도 습기가 계속 스며 올라오기도 한다.      

그런 굴속에서 잠이 올 리가 없다. 그저 자는 둥, 마는 둥 꼬박 밤을 지새울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런때 비닐 조각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요긴하게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비닐이라고는 없었다.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한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어쩌다 폭격이 좀 주춤하다고 생각될 때는 바깥 사정을 몰래 살펴보면서 방으로 나와 생활을 할 때도 있었다.      


캄캄한 굴속, 그리고 고통수스럽기 짝이 없는 방공호에서 갇혀 있다가 그나마 방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이 곧 해방이요,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밤에는 창호지로 바른 문밖으로 한 올의 등잔불 빛조차 새어나가지 않도록 담요나 이불 등으로 문을 가려야 했다.   

   

만일 밤에 폭격기들이 돌아다니다가 불이 환하게 비치는 집을 발견할 때마다 여지없이 사격을 가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마치 땅바닥을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곤 하는 마치 개미들의 목숨처럼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낼 날이 없었다. 실제로 낮에 괜찮겠지 하고 이웃집으로 마실을 가다가 갑자기 퍼붓는 폭격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마을에는 그나마 방공호다운 방공호가 두 개 있었다. 그것은 마을에서 가까운 뒷산과 아랫 동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폭격이 심하지 않을 때, 그리고 조금 안전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깊고 넓게 파놓은 방공호였다.        

       

그 방공호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나무를 하러 간다든지 가까운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공습이 시작될 기미가 보인다 하면 곧 그 방공호로 달려가서 숨곤 하였다. 그리고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고 느껴질 때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간단한 양식거리까지 가지고 달려가서 한동안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좀 어느 정도 한가해지고 시간이 날 때 아이들은 군대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실제로 병정 놀이를 시켰던 것이다.     

 

훈련을 시키는 사람들은 나보다는 네댓 살 더 먹은 두 명이었다. 그 두 명은 자칭 대장이었다. 그리고 군기도 제법 엄했다. 난 그때 가장 계급이 낮은 졸병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집합하라는 명령을 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집합 장소로 달려가서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모이는 장소는 잔디로 깔린 비교적 넓은 뒷동산이었다.    

  

대장들은 미리 와서 우리들이 모이고 있는 상태를 점검하곤 하였다. 지각을 자주 하거나 훈련 태도를 보고 계급을 올려주기도 하고 강등시켜 주기도 하였다.      


훈련을 받을 때는 반드시 종이를 접어서 만든 모자를 쓰고 받아야 했다. 그 모자는 미군부대에서 주워온 신문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모자 이름은 ‘할로’ 모자라고 하였다.


 대장들은 가끔 계급을 올려주거나 훈련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려주기도 하였는데 계급장은 할로 모자에 그들이 종이로 만든 계급을 한 개씩 달아주거나 떼기도 하였다.  그때 한 딱 한번 진급이 된 적이 있었다. 군가를 씩씩하게 잘 불렀다고 생각한 대장이 올려주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훈련은 주로 총 대신 막대기를 하나씩 어깨에 메고 힘차게 걷거나 뛰는 행진이었다. 행진 훈련은 대장들의 구령에 맞추어 걷거나 뛰기도 하지만, 걸어가면서 군가인지 뭔지 알 수도 없는 행진곡을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 행진곡도 마치 군인답게 목청껏 씩씩하게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강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로 부른 노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또 하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 자라'란 노래였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 앞에 부른 노래를 찾아보니 노래 제목이 ‘혈서지원’이란 곡이었다. 무슨 뜻인지 멋도 모르고 부른 노래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노래의 가사를 2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훈련은 행진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장들의 명령에 따라 가끔 막대기를 든 채 포복도 해야 했고, 은페물 뒤에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 총을 쏘는 훈련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 구해왔는지 불발된 실제 수류탄을 던지는 투척 훈련도 받았다. 만일 그러다가 폭격기가 뜨면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마을 방공호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숨기도 하였다.  

  

난 운이 몹시 좋아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다행히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기에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만히 들이켜 생각해 보면 그 아찔했던 모든 일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나도 모르게 가끔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 * )           



                                                              - 방공호 이야기 1회분 끝 -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남매의 기구한 운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