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방공호

[죽음의 구들장 밑으로 피신했던 이야기]

by 겨울나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세계 역사상 어느 나라든 전쟁으로 패망하고 난 뒤에 가장 먼저 말로는 표현조차 하기 어려운 굴욕적이며 치욕적인 피해를 보는 것은 아녀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끔찍한 일들은 눈 한번 딱 감고 그냥 예사로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굴욕이나 피해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철저히 유린당하고 심지어는 짐승처럼 겁탈까지 이어지는 인간 이하의 만행이 자행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 실례로 우리나라의 역사만 돌이켜 봐도 그렇다. 백제가 멸망하자 3천 명이나 되는 궁녀역시 당나라로 끌려가서 그런 짐승적인 만행과 인간 이하의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향해 궁녀들 모두가 한꺼번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익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째 됐든,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도 익히 배웠기에 지금까지 그 사건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기도 하였다.


그 비극적인 역사를 실감나게 다시 재조명해 준 증거도 살아 있다. 1960년에 영화감독 이규환이 메가폰을 잡아 제작한 ‘낙화암과 삼천궁녀’라는 영화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 당시 그 영화를 직접 감상하면서 3천 궁녀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각인되기도 하였다.


그 영화를 촬영할 시대에는 영화계의 촬영 기법이 너무 발달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궁녀 모형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힌 다음 그 허수아비를 낙화암 위에서 하나씩 백마강으로 내던지게 되었는데 촬영 기법의 엉성하고 허술함을 완전히 뒷받침해주기도 하였다.


그때 궁녀가 팔을 뻣뻣하게 벌린 채 그대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떨어지고 있는 모습들을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영화야 실감이 나든 말든 그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그때 사비성 안에서 살고 있던 백성들의 수는 모두 합해 5만 명이었고, 궁궐 또한 그 구조로 보아 절대로 3천 명의 궁녀를 수용할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는 것은 그 뒤에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 3천 궁녀라는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어느 문헌을 찾아봐도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조선 시대 때 어느 선비 하나가 낙화암 부근을 지나가다 우연히 읊었다는 시의 구절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바로 그 시에서부터 3천 궁녀라는 말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궁녀의 수가 3천 명이었든 30명이었든 굳이 그것을 새삼스럽게 따질 필요는 없다. 3천 명이 아니라 단 세 명이 몸을 던졌다 해도 그것은 나라가 패망했기 때문에 일어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궁녀들이 적군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갖은 굴욕과 유린, 그리고 겁탈을 받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목숨을 던지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보다 더 가깝게는 나라가 망한 뒤 현재까지도 시원스럽게 해결이 안 된 안타깝고도 답답한 일이 아직도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에 앙금처럼 남아 피끓는 울분을 가시지 않고 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갖은 치욕은 물론이고, 차마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굴욕을 철저하게 당했던 아픈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6.25 전쟁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6.25 전쟁 당시 나의 누님은 아마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이로 보아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사나이들의 먹잇감(?)으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럼 누구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일까. 그것은 국군(그 당시 1사단, 밝히기에 좀 꺼려지기도 하지만 )이나 미군, 그리고 중공군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으며 패망한 것도 아닌 전쟁 중에도 그런 짐승이나 저지를 것 같은 만행은 수시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국군이든 미군이든 닥치는 대로 아무 집이나 갑자기 들이닥치며 여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집을 샅샅이 뒤지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쩌다 젊은 여자가 눈에 띄기만 하면 가족들이 두 눈을 뜨고 보는 앞에서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짐승 같은 능욕을 채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겁에 질린 가족들은 딸이나 아내, 그리고 며느리가 눈 앞에서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벌벌 떨며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저항을 하려고 하면 총이나 대검을 닥치는 대로 빼 들고 죽인다고 설치며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당시에는 궁여지책 끝에 집집마다 작은 방공호를 파놓게 되었다. 6.25 당시 방공호를 파놓은 목적과 용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적들의 공격, 그리고 폭격이나 기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젊은 아녀자들이 있는 집에서는 그들을 군인으로부터 행악을 모면하기 위해 각 가정마다 작은 방공호를 비밀리에 따로 파놓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아직 군대를 갈 나이가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인민군들에 의해 의용군으로 마구 끌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진 곳에 파놓은 방공호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의 방공호는 전투기들의 폭격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피 끓는 젊은이(국군과 미군)들이 욕정을 이기지 못해서 아무 때나 수시로 미친 듯이 기습적으로 집집마다 뒤지곤 하는 바람에 그런 만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집집마다 그런 간이식 방공호가 하나나 둘씩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6.25동란 때는 우리의 국군 1사단이 최전방에서 적을 무찌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맹렬히 싸웠기에 혁혁한 전과를 많이 올린 부대로 유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라 수시로 아녀자들을 보는대로 겁탈하는 무서운 행악도 많이 저질렀던 것도 사실이다.


국군 1사단만 그런 게 아니었다. 1사단 못지 않게 중공군들 역시 많은 행악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 어느 때 갑자기 집안으로 기습해 오게 될지 안심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낙네가 있는 집에서는 단 하루도 마음을 놓고 편안히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군들도 툭하면 아무 집이나 쳐들어와서 아녀자들을 상대로 너무나 무서운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야말로 법도 없고 체면도 전혀 없는 인면수심과 같은 못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럴 무법천지에서도 인민군들은 그런 못된 짓을 했다는 소문을 별로 듣지 못했다. 나중에 소문을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만일 인민군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다가 발각이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을 하라는 엄격한 상부의 그들만의 법이 하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우리 마을 어느 친구네 집에 잠깐 가서 놀고 있을 때였다.


그 집은 나와 같은 또래는 물론, 형제들도 많았다. 우리 누나의 나이쯤 되는 처녀도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집이어서 그 당시에도 부엌문도 널빤지로 된 문이 달려 있었다. 우리 집 부엌문은 겨우 가마니로 된 거적문을 달고 살고 있었지만…….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널빤지로 된 대문을 구둣발로 우악스럽게 걷어차며 내 친구네 집으로 불쑥 들어왔다. 대문이 부서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바람에 집 안에서 조용히 놀고 있던 나는 기절초풍을 하며 놀라 대문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문을 박차며 갑자기 나타난 것은 한 명의 미군 병사였다.


그때 미군은 상의는 어디다 버렸는지 군복 바지에 군화만 신고 있었다. 윗도리는 모두 벗어던진 채 알몸이었다. 한 손에는 대검(총 끝에 꽂는 칼)을 힘껏 쥐고 있었다. 술을 좀 마셔서 그런지 아니면 성질이 나서 그런지, 안색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어서 첫눈에 보기에도 기절초풍을 할 정도로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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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집 안에다 대고 영어로 뭐라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들어보나마나 당장 여자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소리에 놀란 내 친구의 아버지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마루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미군을 향해 연신 굽신거리며 싹싹 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여자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말과 손짓을 되풀이하며 싹싹 빌고 있었다. 그러나 고분고분하게 그냥 쉽게 넘어갈 미군이 아니었다.


미군은 친구의 아버지를 향해 한동안 꽥꽥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오른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안쪽에 있는 부엌문을 항해 힘껏 던지는 것이 아닌가.


“휘이익, 딱!!”


공중을 힘껏 날으던 대검은 ‘딱’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엌문 널빤지에 깊이 꽂혀버리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 모두는 기절초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친구 그리고 친구의 아버지는 부들부들 떨며 구경만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미군은 다시 부엌으로 걸어가더니 부엌문에 꽂혀있는 대감을 빼어들고 다시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와서 다시 부엌문을 향해 던졌다.


이번에도 ‘딱’ 하는 요란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엌문에 명중하고 말았다. 그렇게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나는 그의 칼 던지는 솜씨가 놀랍도록 매우 능숙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점점 더 성질이 난폭해진 미군은 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이번에는 군화를 신은 채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그리고는 안방과 건넌방문을 차례대로 열어젖히며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여자가 방에 숨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확인해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뒤, 방에서 뛰쳐나온 그는 다시 뭐라고 시끄럽게 게걸거리며 떠들더니 대문 밖을 향해 급히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그 집 뒷동산을 향해 급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마 군인들이 나타나면 젊은 여자들이 가끔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숨곤 했다는 소문을 그 미군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여자를 찾으러 산으로 올라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뒤로 그 집의 일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우리 집에 있는 대검(군인들이 훈련 중에 잃어버린)을 가지고 그 미군처럼 칼을 던지는 연습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던지는 연습을 열심히 해보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토록 불안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행되고 있어서 젊은 여자들은 가족들과 함께 같은 방공호 속에 숨어서 지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언제 어느 때 갑자기 군인들이 여자를 찾기 위해 방공호 속까지 습격해 올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집에서는 누나 한 사람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누나의 비밀 방공호를 따로 만들어 놓게 되었다.


누나 혼자만이 숨어 지낼 수 있는 그 비밀 방공호는 바로 우리 집 건넌방 구들장 밑이었다. 군인들이 아무리 혈안이 되어 집을 샅샅이 뒤진다 해도 구들장 밑까지 뒤지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건넌방은 소 외양간과 붙어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외양간 쪽에서 건넌방 벽을 허물어버리고 겨우 사람 하나가 기어서 드나들 정도의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그 당시 우리 집 건넌방에는 이미 파주 적성에서 피란을 온 피란민 네 식구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궁이에 불을 때지 말고 밥을 지을 때는 불편하겠지만, 집 밖에서 화덕을 이용하여 밥을 지어 먹으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넌방에서 사는 피란민들은 여름에는 그나마 그럭저럭 지내기가 괜찮은데 겨울이 큰 걱정이었다. 누나가 그들이 살고 있는 방의 구들장 밑에 누워서 지내고 있어서 불을 땔 수가 없어서 난방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의 행학으로부터 누나를 보호하고 구해내기 위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누나는 외양간에 뚫어놓은 벽의 구멍을 통해 구들장 밑으로 들어가서 누운 채 혼자 캄캄한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아마 감옥도 그렇게 건디기 어려운 열악한 감옥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으리라.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구들장 밑은 매우 낮고 좁았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불이 붙은 불길이 재와 함께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통로가 바로 구들장인 것이다. 그러기에 구들장 밑은 겨우 엎드리고 기어들어가서 누울 수는 있어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들장 밑바닥과 천정은 나무를 땔 때 생긴 검댕 즉, 시커먼 그을음이 범벅이 되어 붙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을음이 옷에 묻어서 새까맣게 되었음을 물론, 조금만 건드려도 구들장에 붙어있던 그을음이 얼굴과 몸으로 우수수 떨어지며 쏟아지기도 하였다.


구들장 밑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며 그래서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늘 캄캄한 암흑이었다. 더구나 사람이 구들장 밑으로 겨우 기어들어가고 난 뒤에는 벽에 뚫어놓은 입구까지 짚단으로 몇 겹씩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 속에는 한 오라기의 빛도 들어갈 수가 없는 암흑 세상이었다.


바닥은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깔아서 그런대로 지낼만 했겠지만, 그을음 때문에 누웠다가 머리를 조금 들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한번 누우면 옴짝달싹도 못하고 지내야만 하는 차마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지독한 고문의 나날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끼니때가 되면 허기는 면해야 하기 때문에 달랑 밥덩이나 죽 그릇 하나를 들고 외양간으로 가서 입구를 막은 짚단을 누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헤치고 그 구멍 속으로 음식을 넣어주면 그것으로 겨우 연명만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죽음과 다름없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의 연속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 때가 용변을 처리해야 할 때였다. 용변을 보러 나왔다가 만일 군인들의 눈에 띌 게 걱정이어서 마음대로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으며 그렇게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배를 골려가며 며칠이고 몇 년이고 이를 악물고 지내야만 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죽은 목숨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비단 우리 누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 젊은 아낙네들은 거의 대부분 그런 고통과 암흑과 시련을 이를 악물고 인내로 견디어냈던 것이다.


비행기의 폭격도 무서웠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군인들에게 유린당하지 않기 위해 지냈던 암흑의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누나의 아궁이 밑 방공호 생활은 휴전이 되어서야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며 이겨낸 나의 누나는 지금 87세로 아직도 생존해 있다.

결국, 그렇게 누나의 아궁이 밑 방공호 생활은 휴전이 되어서야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며 이겨낸 나의 누나는 지금 87세로 아직도 생존해 있다.

누나의 방공호!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끔찍하고 암담한 고통의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다른 일은 몰라도 그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앞으로는 절대로 이 땅에 그런 비극적인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만 하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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