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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Sep 24. 2020

방공호 이야기 (3)

[우리마을 젊은이들의 공동 방공호 이야기]

♣ 이 이야기는 6. 25 전쟁 때 실제로 우리 마을 청년 여러 명이 잡혀 평양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옮긴 것임.     

           

6. 25 전쟁 시절, 이미 한번 피란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 마을 사람들은 어느 집을 막론하고 먹을 것이 없이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말 그대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은 이미 인민군들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폭격을 맞아 엉망이었고, 그나마 불에 타다가 만 집도 흉물스럽게 남아있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잘 곳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모두 없으니 모두가 헐벗은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언제 어느 때 다시 폭격기가 와서 폭격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밤과 낮으로 항상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낼 날이 없었다. 정찰기만 한번 하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겁을 먹은 채 미리 방공호로 들어가 숨곤 하였다. 정찰기만 한번 왔다가 돌아가면 그 뒤로 어느새 폭격기들이 와서 폭격을 해대곤 했기 때문이었다.      


정찰기가 돌아간 뒤에 으레 여지없이 공습을 해오는 폭격기는 젯트기(그때는 ‘제비비행기’라고 불렀음)가 아니면 ‘쌕쌔기’(폭격기 이름을 제대로 모름)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서 공습을 해대곤 하였다. 

     

인민군들 역시 별로 먹을 것이 없어서 수시로 마을 사람들이 먹고 있는 양식을 구걸하거나 빼앗아가곤 하였다. 게다가 젊은 청년들이 눈에 띄기만 하면 강제로 잡아다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기가 일쑤였다. 


그러기에 우리 마을에는 집집마다 방공호 하나씩을 파 가지고 있었고, 산 밑에 크게 파놓은 공동 방공호가 두 군데 있어서 위급할 때 누구나 수시로 이용하곤 하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공동 방공호나 집에 파놓은 방공호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들이 가끔 방공호까지 뒤지면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리 마을 청년들은 가족과 함께 지낼 수가 없기 때문에 따로 방공호를 파서 몰래 그 속에서 숨어지내곤 하였다. 그리고 우리 마을 청년들 7,8명은 나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 마을 뒷산 너머 산기슭에 방공호를 크게 파놓고 그 속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방공호 입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나뭇가지들을 베어다 막아놓았다. 그리고 먹을 양식은 그 젊은이들의 어린 동생들이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몰래 갖다가 방공호 속에 넣어주곤 하였다. 만일 먹을 양식을 가지고 가다가 인민군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젊은이들 모두가 그들에게 당장 끌려갈 판이었다.  

    

방공호가 있는 뒷산 정상에는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앞에 겨눈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순찰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의 눈을 피해 방공호로 양식을 나르는 일도 여간 조심스럽고 불안하면서도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름만 방공호였지, 청년들은 볼일을 보거나 잠깐 바람을 쐬고 싶어도 마음대로 나올 수도 없었다. 그 캄캄한 방공호 속에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불안한 속에서 기약이 없는 나날을 숨어서 지내자니 그건 방공호가 아니라 차라리 지옥에 가까운 짐승 같은 생활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나라를 위한 애국정신 하나만큼은 대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밤이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씩 짝을 지어 몰래 방공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무기들을 줍기 위해 산기슭 여기저기를 다니며 뒤졌다. 

     

그때는 전쟁을 하다가 군인들이 버렸거나 흘려버린 무기들을 심심치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가끔 터지지 않은 수류단도 있었고 박격포나 소총 탄알도 있었다. 심지어는 인민군들의 따발총이나 대검들도 주울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제법 많은 무기들을 주워 방공호에 보관하고 있었다.      


만일 인민군들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반항하거나, 유사시에는 그들에게 끌려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민군들과 싸울 계획도 철저하게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였다.      


“딱콩! 딱콩!”     


갑자기 젊은이들이 숨어 있는 방공호 쪽에서 딱콩총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기슭에 여기저기서 악을 쓰며 소리소리 지르는 인민군들의 외침이 들려오며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들어보나마나 인민군들이 사용하고 있는 소련제 장총을 사정없이 쏘아대고 있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에 불안해진 눈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고 모두 밖으로 몰려나와 구경을 하게 되었다.  

         

조금 뒤, 방공호에서 뛰쳐나온 젊은이들이 우리 마을 앞산과 뒷산기슭으로 죽을 기를 쓰고 도망을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인민군들도 그들을 급히 쫓아가면서 연신 총을 쏘아대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마침 내가 가서 놀고 있던 이웃집에도 그 집 아들도 대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오며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바로 그 방공호 속에서 지금까지 숨어 지내던 젊은이였다.    

  

“어머니!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지금 인민군들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어요.”     


젊은이의 눈은 이미 뒤집힌 채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다급한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안절부절을 못하며 바로 급한 대로 그 집 광을 가리키고 있었다.      


“ 그래, 얼른 저 광으로 들어가거라.”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딱콩! 딱콩!”     


어느 틈에 뒤따라 들어온 인민군이 바로 광으로 쫓아 들어가서 사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 역시 겁에 질린 채 순식간에 총살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얼마 뒤, 소문을 들으니 산으로 도망치던 젊은이들 모두가 생포되었다고 하였다. 일곱 명인가 여덟 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후퇴할 때 전화선으로 젊은이들의 손목을 꽁꽁 묶어 줄줄이 매단 채 후퇴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들의 소식을 젼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약 1년 뒤, 기적같은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끌려갔던 젊은이들 중에 유독 한 사람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얼마나 고생을 하며 굶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아 다 죽게 된 몸이 되고 말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열넷인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다시 여러 해가 지난 뒤, 그가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된 자세한 이유를 직접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후퇴할 때 젊은이들을 북쪽으로 끌고 가면서 낮에는 비행기의 폭격이 두려워 산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만 걸어가곤 했다.     

 

젊은이들은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인지 그리고 왜 데려가고 있는 것인지 전혀 말을 해주지 않아서 모른다고 하였다. 그렇게 여러 날을 밤에만 걷고 또 걸어가다가 마침내 어느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단다. 거기가 말만 듣던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 초라하게 생긴 집에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군인이 한 명이 책상 위에 다리 하나를 걸친 채 거만스럽게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벌떡 일어서더니 옆구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끌려간 젊은이들은 결국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이려나보다하며 사색이 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권총을 거꾸로 고쳐 잡더니 권총 개머리로 끌려간 젊은이들의 머리통을 일일이 차례대로 한 대씩 쥐어박았다. 젊은이의 눈에서는 불이 번쩍 나면서 아찔했다.      


그리고는 다른 젊은이들은 끌고 온 인민군을 시켜 어디론가 끌고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사람만 남겨놓더니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그런 못된 짓을 하면 안 된다며 그대로 돌려 보내주었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오직 그 젊은이 한 사람만 돌아오게 된 이유는 젊은이들 중에 그나마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보내준 것이라고 하였다.   

   

다행히도 그들로부터 석방이 된 젊은이는 낮이고 밤이고 정처없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오게 되었다. 재수가 좋으면 아무 데서나 얻어먹기도 하고 풀이건 나무뿌리건 닥치는 대로 먹다가 쓰러지기를 거듭하며 돌아오긴 왔지만 얼마나 걸렸는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 젊은이 역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다. 아마 금년에 83세나 84세쯤 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또한 하나의 전쟁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같이 끌려갔던 젊은이들의 소식을 아직도 생사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을 때까지 몽매에도 애타게 그들을 기다리던 부모님들은 자식을 만나보지 못한 뻐저린 한을 가슴에 간직한 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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