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명장(45)

[임경업, 조선 중기의 명장(1594-1646)]

by 겨울나무

임경업의 본관은 평택으로 그의 아버지 임황은 절충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낸 장군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여러 번의 귀양살이 끝에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임경업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용감하여 그의 성격대로 동네 친구들과 늘 전쟁놀이를 즐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24세 되던 해에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일등 공신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후, 임경업은 뜻한 바 있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가달족을 토벌해 달라는 특별한 부탁을 받아 명나라 군사 10만 대군을 이끌고 가달족을 무찔러 황제로부터 ‘총병’이란 높은 벼슬을 받았다.


한편, 당시 만주 대륙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나라 이름을 ‘후금’ 이라 칭하고 명나라와 조선에 자주 싸움을 걸어오며 지분덕거리곤 하였다.


그 즈음, 명나라에서 돌아온 임경업은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 부사에 등용되어 북방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의주로 가서 백마산성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1636년에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용맹과 지혜를 발휘하여 후금 군사들의 사기를 단숨에 꺾어 놓고 말았다. 이에 후금 군사들이 백마산성을 피하여 몰래 서울로 맹공격을 해 왔기 때문에 조선은 싸움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후금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비보를 전해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며 원통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을 많이 도와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임경업은 명나라를 위해 오랑캐를 무찔러 주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와 조선은 더욱 친한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공교롭게도 청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청해 오자, 자신의 뜻과는 달리 명나라와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임경업은 명나라에 수시로 전략을 알려 주어 명나라의 피해를 줄이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결국 청나라에 발각되어 청나라에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용맹과 기지를 발휘하여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스님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동안 산속에 묻혀 있던 그는 1643년에 청나라를 공격할 굳은 각오를 하고 명나라로 망명하여 지내던 중 불행하게도 적의 포로가 되어 다시 고국으로 호송되었다.

또한, 임경업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두 왕자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자신도 살아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김자점의 거짓 음모에 속아 압록강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들의 무리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임경업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는 군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무리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길로 임금을 뵙고 자초지종을 아뢰게 되었다.


이에 임금은 크게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김자점을 지금 당장 잡아들이도록 하여라! 내가 직접 목을 베리라!”


그리고 임경업에게는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몹시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일단 집에 가서 편히 쉬고 내일 입궐토록 하시오!”

임경업은 임금님의 분부대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거짓이 모두 드러나자 이번에는 임경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런 김자점의 음모를 전혀 알 리 없는 임경업은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막 대궐 문을 나서고 있던 때였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김자점이 힘껏 내리치는 쇠망치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으아악!”

천하의 용맹스러운 임경업이었지만, 갑자기 뒤에서 내리치는 쇠망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당대 천하의 장수 임경업은 간교하기 그지없는 신하인 김자점의 쇠망치를 맞고 불운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지금도 충주의 충렬사와 연평도의 충민사 등에서는 해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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