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물(64)

[이후백, 조선 선조 때의 이조판서(1520~1578)]

by 겨울나무

'부정한 행동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고, 이와 반대로 정의로운 행동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로울 것이 없다' 고 하였다.

사람이 바른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어렸을 때부터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공연한 욕심을 갖거나 조금이라도 그릇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사회의 해로운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 선조 때에 이조판서를 지낸 이후백은 평생 결코 부정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으며 오직 정의롭게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의 그런 성격은 관료를 등용할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드시 사람 됨됨이와 실력을 신중히 알아본 후에 이 사람이라면 틀림없다는 판단이 서야 비로소 등용하였다.


또한, 아무리 권력이 있는 사람의 부탁을 했다 하여도 그 자리에 앉힐 자격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그의 청을 거절하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으로 임명된 사람이라 해도, 어쩌다 실수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몇 날 며칠을 걱정과 번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아, 이런 변이 다 있나? 내가 어쩌다 그런 사람을 등용시켰던고! 나 한 사람의 실수로 나라의 일이 크게 그르치게 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도다!”


그의 그런 강직한 성격 때문에 감히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그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벼슬자리를 부탁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백의 집에 뜻밖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는 이후백과는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 사람은 결국 넌지시 벼슬자리 하나를 부탁하게 되었다.


이후백의 곧은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친척이기도 하고 또한 그 자리에 앉을만한 덕망을 쌓았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어렵게 부탁을 하게 되었된 것이다.


그러자 이후백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한동안 소식조차 없던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 리가 있나!’


이후백은 은근히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책 한 권을 친척 앞에 꺼내 펼치면서 말했다.


"자, 여기 적혀 있는 걸 좀 보시오.”


손님의 눈이 둥그렇게 되어 책과 이후백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게 되었다.


"그게 도대체 뭡니까?"

"이건 내가 오랫동안 앞으로 벼슬자리에 앉힐 만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명단을 적어 놓은 것이라오. 자, 자세히 보시오!”


그러자 한동안 긴장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겨 보던 친척이 갑자기 한껏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여, 여기 제 이름도 적혀 있군요. 이렇게 인정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이후백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맞아요. 당신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분명히 보셨죠?"

”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말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어떻게 갚아 드려야 할지…….”


친척은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자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후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말은 당신이 이렇게 벼슬자리를 부탁이나 하러 돌아다니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란 말이오.”


친척은 그만 심한 무안을 당한 채, 금세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후백이 다시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 어찌 이제 와서 당신을 벼슬자리에 천거할 수 있겠소. 매우 미안하고 안 된 일이기는 하지만 당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이름을 지워버려야 되겠소.”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조금 전에 부탁드린 말씀은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도로 담을 수가 있겠소.”


“……!!“


이후백은 이렇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붓을 들어 친척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말았다.

정말 강직하면서도 냉정하기 그지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까만 먹물로 시커멓게 지워지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친척의 속도 먹물처럼 시커멓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울상이 된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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