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농증보다는 두통 치료를 위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정확히 1980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난생처음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축농증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난 늘 만성으로 따라다니는 두통뿐만 아니라 코가 자주 막히고 숨을 잘 쉴 수도 없어서 일상생활을 할 때 여간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두통이라 하지만, 코가 자주 막히고 코도 자주 나오는 축농증 역시 여간 불편하고 괴로운 병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리고 그만큼 힘든 것이 축농증이기에 그 당시 각 방송국에서는 ’코로 숨을 쉴 수 있으니까 이렇게 날아갈 것처럼 시원할 수가 없다‘ 라는 대사를 넣은 광고가 한창이었을까!
난 그래서 혹하는 마음에 그 약도 구입해서 먹어보았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많은 진통제를 사용해왔기 때문인지 내겐 그 약도 아무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였던가. 결국, 그 약 역시 내게는 광고만 요란한 약이 되고 만 셈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나에게 지금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통스러운 두통이었다. 축농증쯤은 두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질환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 누군가에게 축농증을 해결하면 두통이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매우 반가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눈이 번쩍 띄었다. 두통만 해결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에 축농증도 축농증이지만, 그보다는 두통을 시급히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수술 예약을 잡아놓게 된 거이다.
드디어 수술하는 날, 난생처음 약간은 떨리기도 하는 비장한 각오로 수술대 위에 눕자 우선 마취를 시키고 모든 수술 준비가 끝나자 두 명의 의사가 나타났다. 몹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다음 순간, 의사는 바로 나의 윗입술을 꼭 잡고 위로 젖히더니 메스를 들고 나의 잇몸을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레이저 등으로 메스를 대지 않고도 쉽게 수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잇몸에 붙은 살을 모두 제거하고 비공 속이 훤히 보일 때까지 자른 다음 윗입술을 젖혀놓고 농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태어난 체질 때문인지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너무나 많은 매를 맞으며 성장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아픔은 이를 악물고라도 참을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수술에 임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무리 이를 악물고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나의 잇몸을 잘라내기 시작하자 난 나도 모르게 그만 자지러들 듯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의사가 잠시 수술을 멈추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 양반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시구만. 아파도 좀 참아요.”
그리고는 다시 서서히 칼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의 비명 소리에 이번에도 깜짝 놀란 의사가 다시 수술을 멈추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마디 묻게 되었다.
“아니 어린아이들도 아프다는 말없이 잘 들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엄살이 심해요?”
난 그런 중에도 참을성이 없다는 말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마취를 더해 달라는 애원과 함께 혹시나 하는 생각에 궁여지책으로 나의 과거에 대해 설명을 하게 되었다.
“마취를 조금 더 강하게 해주세요. 저는 도저히 못 참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약 3,40년간 진통제를 복용해 와서 마취가 듣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제발 마취를 더 시켜주세요.”
그러자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취 주사를 더 놓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그 뒤부터는 다행히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고 수술을 끝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 의사도 전혀 모르고 있던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평소에 진통제를 과다 복용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마취를 더 강한 농도로 시켜야 된다는 사실을…….
나의 윗입술은 눈가에 가서 덮힐 정도로 뒤집혀 가고 있었다. 그렇게 윗입술을 위로 젖히기 위한 작업을 하기 위해 연신 칼을 대자 의사 한 명이 집도하는 의사에게 말을 했다.
“이제 그만 뒤집어도 될 것 같으니 그만 자르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야. 조금 더 잘라내야 돼.”
그렇게 해서 나의 윗입술은 완전히 뒤집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비공 깊숙한 곳에 그동안 쌓여 있던 농을 모두 긁어내고 있었다. 그 작업이 끝나자 이번에는 바늘과 실을 이용하여 금방 찢어낸 살들을 원래대로 열심히 꿰매고 있었다.
바느질이 다 된 다음에는 플라스틱이 아니면 나무로 된 망치같은 것으로 나의 이를 여기저기 두드리며 때리고 있었다. 수술을 하는 동안 이가 모두 흔들리고 흩어진 것을 원상복구하는 작업이라 하였다.
그렇게 약 50분간의 마치 지옥 같았던 수술은 모두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 2,30cm 가량 되는 가제를 핀셋을 이용하여 콧구멍 속에 쑤셔 박아대고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었다. 콧구멍 하나에 3기씩 무려 6개나 쑤셔 박고 나서야 모든 수술이 끝났다.
난 그때야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의 콧구멍 깊숙한 곳이 그렇게 긴 가제가 6개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크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얼굴 모습은 영 말이 아니었다. 가게를 6개나 쑤셔 박았기 때문에 양쪽 코와 볼이 불룩하고 보기 싫게 튀어나와 있어서 마치 괴물을 연상케 하였다.
거울을 보니 나의 입술은 50분간의 모진 고통을 참느라고 새까맣게 검정색이 되었고, 입술이 모두 보기 싫게 갈라진 흉한 꼴이 되고 말았다.
수술이 끝나자 곧 휘체어를 타고 입원실로 가게 되었다. 그때는 축농증 수술 환자는 보통 3일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2인용 병실이었다.
입원실로 들어감과 동시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산더미처럼 갖다가 주었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올 때마다 계속 그 화장지로 닦아내라고 하였다. 의사의 말대로 코에서 웬 피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쉴 새 없이 자주 코피를 닦아내야만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 또 한가지 있었다. 바로 담배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해 입이 더욱 마르고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누가 아무래도 못말릴 일이었다.
참다못해 하는 수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병실에 앉은 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입으로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코로 나가게 할 수가 없으니 그저 입으로 도로 연기를 뱉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병원에서도 금연 단속이 심하지 않아 밖에 나가지 않고 침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담배를 몇 모금 빨다 보니 입과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게 바로 지상낙원이요, 무릉도원이며 천당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의사가 입원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콧구멍을 다 막아놓았는데도 담배를 피우세요?”
난 조금 무안해진 얼굴로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담배를 피우니까 이렇게 시원하고 살 것 같은걸요. 난 아마 교도소에 가야만 못 피울 것 같은걸요.”
그러자 의사의 한마디 대꾸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어이구, 구제불능이군!”
의사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는 병실을 나가버렸다. 맞는 말이었다. 난 그래서 지금까지도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며 끊으라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못 견디는 구제불능의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축농증 수술을 한 지 어언 31년째가 되었지만, 축농증은 불행하게도 조금도 나은 기색이나 변화가 없다. 그렇게 고생을 많이 참고 견디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수술 이전의 증세 그대로 고생을 하고 있다. 오히려 수술할 때 냄새 맞는 기관을 제거했기 때문에 전혀 아무것도 냄새를 못 맡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그럼 두통은 어떤가? 두통 역시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한 채 여전히 그 뒤에도 두통에 시달리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병원이라는 것은 왜 이렇게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병원에 가면 낫는 병도 많다던데, 그런 걸 보면 참 나는 특이한 체질로 태어난 것만 같아 그저 답답할 뿐이다.
* 이 세상에 아프다는 말을 듣기 좋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다음에는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코골
이 수술에 대한 실패담을 써볼 예정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