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작동화

바람은 불어도(1)

[중편 창작동화 4회 중 1회분]

by 겨울나무
※ 이 글은 오래전에 이미 브런치에 올렸던 졸작입니다. 1회분 내용에 수정할 부분이 있어서 다시
수정하여 올립니다. 작가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마치 쇠붙이라도 삽시간에 녹여 버릴 듯한 무더운 불볕더위가 벌써 여러 날째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선풍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지만 더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오래 돌려서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무더운 날씨여서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어이구, 짜증 나라.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네!“

수미는 짜증스럽게 선풍기의 스위치를 껐습니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모터 소리조차 공연히 시끄럽고 짜증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수미는 지금 그렇게 더운 날씨였지만, 방문을 꼭 닫은 채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방학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더위 때문에 아무리 집중을 하려고 해도 어느 것 한 가지도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 수미네 집안은 마치 물을 끼얹은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가끔 밖에서 자동차들이 오가는 시끄러운 소리들, 그리고 수미네 약국으로 약을 사러 오는 손님들이 아빠와 주고받는 목소리, 또한 이따금 건넌방에 누워 헛소리를 하고 있는 엄마의 가슴 아픈 목소리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런 소리라도 들려오지 않는다면 수미네 식구들 모두는 더욱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벌써 생병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미는 모든 게 짜증스럽고 귀찮다는 생각에 하고 있던 숙제를 밀어젖히고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습니다.


'아, 이렇게 더운 날에 할아버지와 성구는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오늘은 끼니나 거르지는 않았을까?‘

수미의 생각은 어느새 목마 할아버지와 성구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수미의 생각이 이번에는 어느 틈에 다시 경수에게로 달려갑니다.


‘불쌍한 우리 경수는 이렇게 더운 날씨에 시원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하늘나라로 간다는 데 뜨거운 해님 곁에 가서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여기보다 더 더워서 고생을 하고 있을 거야!’

수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따분해하고 있을 바로 그때였습니다.


”수미야, 뭐하고 있니? 아빠가 잠깐 좀 들어가면 안 되겠니?“


”……?“


약국을 찾는 손님이 잠깐 뜸했는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빠가 조심스럽게 수미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 바람에 가게에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이 방으로 따라 들어오면서 방안이 금세 시원해지고 있었습니다.


”수미야, 넌 덥지도 않니? 방문이라도 열고 있으면 이렇게 시원하잖아. 자, 더운데 우선 이거라도 마셔보렴.”

아빠는 수미가 평소에 좋아하던 드링크제를 손수 뚜껑까지 따서 수미 앞에 내밀었습니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시원한 박카스었습니다.


”…….“


그러나 수미는 아빠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은커녕, 박카스를 마실 생각조차 없다는 듯 다시 책상 위에 푹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자, 더우니까 어서 받아 마셔보라니까.”


수미는 그제야 마지못해 박카스 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아무 말없이 천전히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수미를 한동안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아빠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수미야, 너까지 이러면 아빤 어떻게 하니? 그리고 몇 달째 누워서 앓고 있는 엄마 생각을 해서라도 힘을 좀 내야 하지 않겠니?”


”…….“


수미는 마지못해 박카스를 조금씩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을 뿐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수미야,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을 아빠가 왜 모르겠니?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전보다 더 기운을 차리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아빠도 힘이 나고 엄마의 병도 얼른 나을 게 아니겠니?”

”…….“


사실 수미는 몇 달 전만 해도 늘 상냥하고 착한 성격이어서 아빠와 엄마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음은 물론 같은 반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아주 대단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뛰어나게 잘해서 학교에서도 수미라면 모르는 선생님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명랑하던 수미의 성격과 표정이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도 말이 없는 수미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토록 명랑하고 상냥하며 착하기만 하던 수미의 성격이 이렇게 갑자기 달라진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년도 훨씬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여보, 우리 아기 하나만 더 낳으면 안 되겠어? 수미 동생 말이야.”


아빠가 느닷없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엄마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기를 낳자니요?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깜짝 놀란 엄마의 눈이 금세 둥그렇게 되어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빠가 약간 더듬거리며 무거운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은 말이지. 나 요즈음 좀 창피해서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공연히 욕심이 나기도 하고 말이야.”

“창피한 건 뭐고, 공연한 욕심이 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러자 아빠는 다시 쑥스러운 표정이 되어 대답하였습니다.


“가끔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면 좀 짓궂은 친구들이 자꾸만 놀린다니까.”


"당신을 놀리다뇨? 도대체 뭐라고 놀린다는 거예요?“

”글세, 나만 보면 아들 하나 제대로 낳지 못하는 병신이라는 거지 뭐.“


“그래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내 말은 결국 다른 게 아니고, 아들 하나만 더 낳자 이거지 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조금은 민망했던지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를 향해 눈을 가볍게 흘기면서 딱 자르듯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뭐예요? 당신 나하고 결혼 전에 약속한 거 벌써 잊으셨어요? 난 그렇게 못해요.“

아빠는 엄마의 말뜻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능청스럽게 기억이 안 난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가 결혼 전에 어떤 약속을 했었지?”


"에이그, 능청스럽기는 ……. 그걸 정말 몰라서 지금 나한테 묻고 있는 거예요?“


“글쎄, 생각이 안 난다니까."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낳아 잘 기르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예요?”


"아하! 내가 그랬었던가? 내기 가령 그랬다 해도 그땐 그때지 뭐.“


"으이그, 남자들이란 다 저 모양들이라니까, 난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요. 내가 뭐 아이나 만드는 무슨 기계로 아셨어요?"

”원, 사람 고집하고는……. 죽은 사람의 원도 풀어 준다는데 그래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하늘 같은 남편의 소원 하나 못 풀어 준단 말이야?“

”쳇! 나원 기가 막혀서……. 당신은 이럴 땐 꼭 하늘 같은 남편이니 어쩌니 하면서 사람을 꼬시더라.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만일 그 이야기를 수미가 들으면 얼마나 서운해하겠어요?“


엄마는 말문이 막힌다는 듯 아빠에게 다시 눈을 예쁘게 흘겼습니다. 아빠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아까보다 더욱 신바람이 나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수미가 들으면 서운해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으이그,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기는……. 당신이 지금 아기를 하나 더 원하는 것은 수미가 딸이기 때문에 결국 딸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얘기 아녜요?”


“아니야. 그런 건 절대로 아니라니까.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소리야. 수미도 동생 하나 갖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당신 알기나 해?”


“어이구, 퍽도 그 애가 당신한테 그렇게 얘기했겠수.”

그러자 아빠는 더욱 펄쩍 뛰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아, 글쎄 그건 정말이라니까. 수미가 나한테 그런 얘길 한 게 한두 만일 줄 알아?”


“글쎄, 난 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어요.”

“어휴, 사람도 참, 그렇게 내 말을 못 믿으면 앞으로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어떻게 같이 살 거야? 당신 내 말을 그렇게 믿지 못하겠어? 당장 확인해 볼까?”


아빠는 이렇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수미를 당장 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빠, 갑자기 왜 불렀어?“


아빠가 급히 달려온 수미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수미야, 너 똑바로 말해야 한다. 너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아빠한테 몇 번 아빠한테 말한 적이 있니 없니?”

“……?”


느닷없는 아빠의 물음에 어리둥절해진 수미가 아빠와 엄마의 눈치를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엄마가 수미에게 물었습니다.


“너 그게 정말이었니?”

“응, 그렇다니까.”


수미는 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습니다.


엄마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네가 동생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지?”

그러자 수미가 활짝 밝아진 얼굴로 다시 물었습니다.

“왜? 동생 하나 낳아 주려고?”


"글쎄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해봐.“


“우선 혼자 지내기가 심심하잖아.”


“뭐가 심심한데?”


“다른 친구들은 말이지. 날마다 동생이나 오빠, 그리고 언니들하고 한 집에서 재미있게 놀았다고 만날 때마다 얼마나 자랑들을 많이 하는지 엄만 알기나 해?”


“그럼 우리 수미가 그게 그렇게 부러웠던 말이지?”


“그러엄, 부럽고말고. 그리고 집에 오면 나하고 같이 놀아 줄 사람이 없어서 늘 심심하게 지내고 있잖아.”

“뭐라고? 집에 오면 왜 같이 놀아 줄 사람이 없어? 네 곁에는 늘 아빠가 있고, 또 엄마도 있잖아?”


“에이, 그렇지만 엄마나 아빠가 나하고 같이 한가하게 인형 놀이나 소꿉놀이를 할 수는 없잖아.”

“…….”


수미의 대답에 엄마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옆에서 엄마와 수미의 이아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빠가 신바람이 나서 슬그머니 끼어들었습니다.


"그것 좀 봐. 내 말이 틀려? 수미도 그렇게 동생을 원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수미 동생을 딱 하나만 더 넣자 이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흥, 그러다가 또 딸을 낳으면 어떡하고요?”

“그거야 뭐 억지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할 수 없지 뭐.”


그러자 이번에는 수미도 덩달아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응석을 부리며 보챘습니다.

"엄마, 그래, 응? 난 남자 동생이든 여자 동생이든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낳아 줘 응? 엄마아.“


"어이구, 부녀끼리 죽이 맞아 정말 잘들 놀고 있네, 잘들 돌아. 흥, 난 아기를 더 낳든 말든 모르니까 어디 마음대로들 해 보라구.“

엄마는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왠지 민망스러웠던지 갑자기 수미의 손을 홱 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엄마의 뒤를 향해 아빠가 짓궂은 목소리로 크게 소리내어 웃으면서 소리쳤습니다.


"으하하하……. 아기를 낳는 걸 당신이 모른다면 그림 나보고 낳으란 말이야?”

아빠가 통쾌하게 웃는 바람에 수미도 덩달아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고 있었습니다.


“호호호…….” ( * )


- 4회 중 1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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