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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n 13. 2021

백주(白晝)의 가정 침입 강도
사건 (1)

[우리 집 대낮 강도 사건 사례①]

※ 거짓말 같은 이 ‘강도 사건 사례’는 앞으로 4회에 걸쳐 이어집니다.      



1980년대 중순 무렵,     


서울의 한 복판에서 백주의 가정 침입 강도 사건이 기승을 부리고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CCTV와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80년대 중반, 한때 내가 살고 있던 동네 주변에서는 연일 대낮 날강도 사건이 극성을 부리며 유행처럼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은평구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불광 1,2,3동과 갈현동, 그리고 대조동 등에서 더욱 강도가 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강도질’과 '날 강도질’을 사전적 의미로 찾아보게 되었다.   

  

‘강도질’은 폭행이나 협박으로 남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날강도질’이란 아주 뻔뻔하고 악하게 다른 사람의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짓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그 말이고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그 당시의 자행되던 강도들은 날강도질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다.        


누구나 강도라고 하면 한밤중에 골목길 등, 으슥한 곳에서 행인에게 갑자기 달려들어 흉기를 들고 협박을 하며 돈이나 물건을 갈취하는 것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강도들은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밤에는 절대로 강도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밝은 대낮에만 강도가 극성을 부리곤 하였다. 참 대담한 녀석들이었다. 대낮이라 해도 주인이 없는 빈집은 절대로 강도가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집이나 주인이 집에 있을 때만 강도의 공격을 받곤 하였다.     

 

밤에는 죽은 듯이 잠잠하다가 대낮만 되면 주인이 집에 있을 때만 강도질이 성행하게 된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주인이 있어야 사람을 묶어놓거나 흉기로 협박을 하면서 돈이나 통장, 그리고 패물을 그들이 직접 찾는 것보다 주인이 알려주는 대로 갈취해가기가 훨씬 수월하고 시간상으로도 절약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대낮에 주인이 있는 집만 골라서 강도가 들어오곤 했기 때문에, 낮에는 누구나 집을 지키고 있기가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낮에는 집을 비우고 밖으로 나가 있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찾아들어오곤 하는 사람들도 제법 늘어가고 있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 강도가 그만큼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처럼 CCTV나 휴대폰만 있었어도 절대로 그런 강도들이 활개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86년, 난 어쩌다 여유가 좀 생겨서 불광2동에 제법 큼직한 2층 단독주택을 하나 구입하게 되었다. 새로 구입한 집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그런대로 새집이나 다름없었으며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 집을 구입하자마자 누군가의 솔깃한 권유를 듣게 되었다.   

   

그 정도 넓이와 위치라면 새로 건물을 높이 올리고 세를 놓으면 더욱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난 결국, 새로 구입한 2층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 멀쩡한 집을 부숴버리고 난생처음 4층 건물을 올리기로 하고 착공을 하게 되었다.       

 

집을 맡아 올리게 된 사람은 마음씨 좋아보이는 젊은 건축 설계사였다. 그는 내 집을 짓는 것이 난생처음 처녀작이라며 그런대로 정성을 들여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착공한 지 1년이 걸려서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제법 그럴 듯한 집이 완공되었으며 87년 중순부터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새로 지은 집은 이른바 다세대 주택이었나 보다. 1, 2층에는 각각 두 가구씩 4가구에 세를 놓았으며, 3층에는 내가 살게 되었다. 4층 다락방은 주로 나 혼자만이 사용하는 조용하면서도 제법 널찍한 공간의 서재를 꾸미고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새집으로 들어간 즐거움과 행복을 마냥 누리며 살아가던 88년 2월의 어느 날이었다.      


뜻밖에도 MBC 방송국에서 느닷없이 전화 연락이 왔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모습, 그리고 지금까지 글을 써온 과정,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겠다는 계획 등을 취재하고 싶다는 반가운 전화였다.    

  

그러나 난 분에 넘치는 방송국의 제안에 선뜻 수락하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방송에 나갈 만큼 크게 이름이 난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사실 난 그때만 해도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어서 방송국의 취재를 수락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다시 생각해 본 뒤에 연락하겠다고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난 한때 몹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방송국의 취채를 선뜻 수락할 수 없게 된 것은 그때, 나는 어느 출판사에서는 한꺼번에 대여섯 권의 책을 한꺼번에 출판할 계획이 잡혀 있어서 원고를 쓰기가 무섭게 속속 책을 출판하면서 계속 독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에는 책 한 권 내기가 어려운 시절에 되고 말았지만, 그때는 원고를 쓰기가 무섭게 책으로 출간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혹자는 ‘백주의 날강도 사건’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하게 갑자기 웬 출판사 이야기로 방향이 흘러가고 있는가 하고 충분히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도 사건을 설명하기 이전에 이 변명같은 이야기부터 설명해야 ‘날강도 사건’에 대한 이해가 더욱 쉽기 때문이라 하겠다.       

  

난 한때 운이 몹시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현재 모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원고를 쓰고 있는 그 출판사에서는 내가 혹시 다른 출판사와 2중계약이라도 할 것을 우려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원고를 쓰기도 전에 몇백만 원이나 되는 거액을 선금으로 미리미리 통장에 입금해 주며 계속 원고 독촉을 하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글이 특히 뛰어나게 훌륭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단 원고를 쓴 다음에는 교정이나 수정이 전혀 필요 없었다. 그만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냥 한번 쓰기만 하면 그 뒷일은 모두 출판사에서 다 알아서 오자, 탈자, 교정 등을 모두 알아서 처리해 주곤 하였다.    

  

항상 마감일이 촉박해서 교정이나 수정 따위도 없이 그저 쓰는 일이 더 급했던 것이다. 특별히 원고 길이 제한도 없었다. 원고 분량이 한 권 정도 되면 바로 책이 되어 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2백 자 원고지 장당 얼마로 계산해서 통장으로 꼬박꼬박 입금이 되곤 하였다.    

   

이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80년대에 백만 원 단위의 돈은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내가 받고 있는 월급의 두세 배나 되는 원고료가 다달이 통장으로 입금되곤 하였다. 


그러나 돈도 좋지만, 그리고 혹자는 즐거운 비명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완전히 족쇄에 물린 

느낌이요, 틈만 나면 밤 늦게까지 꼼짝없이 앉아서 원고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노예에 가까운 지겨운 하루하루의 연속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일이 바쁠 때는 그만큼 바쁜 일이 더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때 또 전부터 조금 인연이 있는 ‘교학사’에서는 “표준전과‘ 6-2 국어과를 다시 수정해서 출판을 하겠다며 표준전과를 써달라는 청탁이 온 것이다.   

     

나는 전과를 새로 잘 쓸 능력이나 실력이 없는 사람임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가령 그런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현재로서는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라고 한사코 사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배부른 소리 같지만, 나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만한 시간이 없기에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 본인이 우연한 기회에 교학사에서 4~6학년용 ’표준 국어학습‘이란 문제집 두 권을 출제한 경력을 좋게 인정해서 그랬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듯 교학사 편집 이사가 무려 3차례나 손수 직장까지 직접 찾아오면서까지 제발 써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며 조르고 있었다.      


바쁜 일이 어디 그뿐이랴. 그때는 가끔 심심치 않게 월간 잡지사에서도 청탁이 오기도 하고, 직장도 나가야 하고, 강의도 나가야 하고,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여서 조금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방송국 취재까지 응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그땐 오래도록 그렇게 마냥 즐겁고 빠쁜 나날만을 보내게 될 줄로만 알았다. 나처럼 글재주가 없는 사람에게도 그런 전성기(?)가 있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에게는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바쁘다 해도 모처럼 차례가 온 방송 출연의 기회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망설이던 끝에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게 되었다. 취재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방송국의 대답은 한나절만 시간을 내주면 넉넉하다는 답변이었다. 그래서 결국 얼떨결에 나도 모르게 방송 취재를 수락하고 말았다.    

  



이윽고 방송국과의 취재 약속이 된 날, 아침 9시경에 방송국에서는 아나운서 한 명과 촬영기사와 조명기사 등, 대여섯 명이 카메라와 조명기구 등,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 취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는 장면(그때는 컴퓨터가 아닌 주로 2백 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썼음)부터 촬영을 하였다. 그들의 지시와 요청에 따라 원고지에 글을 쓰다가 잘 써지지 않을 경우, 원고지를 가끔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는 장면도 그럴듯하게 연출하였다.     

 

그다음에는 아나운서와의 1대 1 대담이었다. 지금까지 주로 어떤 주제로 글을 써왔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주제의 글을 쓸 계획인가를 아나운서가 묻고 대답하는 문답식의 취재가 진행되었다.      


그다음에는 마침 집에 있던 우리 아이들 중의 하나(초등학생)를 피아노 앞에 앉게 한 다음 내가 그 옆에 앉아서 피아노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장면도 연출하게 하였다. 가끔 촬영기사가 어느 쪽으로 카메라의 앵글을 잡아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는 내가 직접 앵글을 잡아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미 내가 과거에 극영화 조감독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시키는 대로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라서 잘 응해주었다.      

 

그럭저럭하다 보니 한나절만 끝난다는 취재가 그날 오후에야 겨우 끝을 맺게 되었다. 가끔은 촬영 도중에 NG가 나서 재촬영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점심까지 우리 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대접하다 보니 그럭저럭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된 취재 결과는 88년 2월 말경, 그 당시 ’차인태의 아침 새 출발‘이란 프로에 영광(?)스럽게 방송으로 나가게 되었다. 취재는 거의 하루종일 걸렸지만, 방송은 겨우 10분 안팎으로 방영되지 않았나 기억하고 있다.        

      

그토록 영광스러운(?) 방송이 내게 크나큰 화근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정확히 88년 3월 2일, 오후 3시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고 CCTV도 없으며 고작해야 가정이나 직장에 전화가 한 대씩만 있을 때였다.   

   

늘 그렇지만, 난 그날도 직장에서 한창 바쁜 일을 처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동료의 말에 무슨 일인가 하고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여간해서는 직장으로 전화를 안 하던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 걸 보니 예삿일은 아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보! 되도록 빨리 집으로 좀 와줘요!“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아내는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도 말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덜덜 떨며 다 죽어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왠지 예감이 몹시 불안했다.   

   

난 그런 중에도 아내에게 농담으로 대꾸해 주었다.        


”이 사람아,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몰라도 난 이래 봬도 국록을 먹고 있는 국가 공무원이란 말이야. 그런데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일반만의 전화 한 통으로 함부로 개인 행동을 할 처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을 좀 해봐요.“   

       

그러자 아내는 여전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강도를 맞았다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강도들한테 꽁꽁 묶여있다가 이제 겨우 풀려났다고 하였다. 은근히 불안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 집에도 오지 말아야 할 대낮 강도가 오고야 만 것이었다.       


난 더럭 겁이 난 표정으로 다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묻게 되었다. 3인조 강도가 들어와서 아내와 막내아들(그 당시 4~5살), 그리고 아랫집에서 잠깐 놀러 왔던 아주머니를 꽁꽁 묶어놓은 다음, 한 녀석은 칼을 들고 감시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녀석은 은행에 가서 결국 현금을 찾아온 다음, 만일 경찰에 신고하면 그때는 가족들 모두 몰살하게 되는 줄 알라는 협박을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만일 신고를 하게 되면 우리 가족들 모두가 죽게 될 텐데 어떻게 신고를 할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난 당장 집으로 달려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다음, 직장에서 바로 경찰에 신고부터 하였다.     

   

자동차를 몰고 급히 집으로 달려가 보니 우리 집 주변에는 이미 각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 그리고 경찰 순찰차 몇 대, 119구급대까지 와 있었으며 경찰과 형사들, 그리고 소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는 이미 집에 없었다.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내는 이번 사건의 자세한 조사를 받기 위해 지금 은행으로 끌려가 있다고 하였다.    

   

난 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아내는 그동안 너무 긴장하고 놀란 나머지 은행의 긴 의자에 누운 채 정신을 못 차리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은행에도 형사와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들이 모여 한 가지 무슨 이야기라도 더 들어보기 위해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귀찮게 계속해서 자꾸만 묻고 있던 중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전산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면 통장과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만 알면 누구나 찾아갈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그들이 은행에 가서 찾아간 금액은 890여만 원이나 되었으며, 그 당시 서민으로서는 거액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깐 설명했듯이 그 당시엔 백주의 대낮 강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여서 난 혹시라도 우리 집에도 강도가 들어오게 될 것을 미리 가정해서 만일 그들이 오게 되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통장과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를 순순히 알려주라고 아내에게 미리부터 늘 신신당부를 해 놓았던 터였다.      


그 까닭은 이미 우리 집보다 먼저 다른 집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의 이갸기를 들어보니 강도에게 통장이나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려고 우물쭈물하다가 강도에게 사람이 다치게 된 사례가 가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우리 집은 순순히 모든 것을 강도에게 내주고 비록 돈은 잃었지만,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사람이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로부터 잃어버린 사람이 죄가 많다더니 정작 뜻밖에도 더 어렵고 힘든 일은 그날 저녁때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돈만 잃으면 그대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돈 잃고 이렇게 귀찮고 어려운 일, 그리고 시달림을 받는 일이 생기게 될 줄은 미처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 )   

    


    -’우리 집 대낮 강도 사건‘ 사례 1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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