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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n 14. 2021

백주(白晝)의 가정 침입 강도
사건 (3)

[우리 집 대낮 강도 사건 사례 ③]

현재 우리 집의 강도 사건으로 인해 한껏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파출소장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라도 누그러뜨리고 돌려놓아야만 내가 조금이라도 편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경찰들을 한껏 비웃는 내용의 ‘가십’을 실은 중앙일보의 기사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글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되겠다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신문에 싣게 되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파출소장의 마음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조목조목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첫째가십에서는 경찰 순찰함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지척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확인해 보니 순찰함은 우리 집과 가까운 지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적어도 50~80m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정정하였다.    

    

둘째밤도 아닌 멀건 대낮에 강도를 맞게 하였으니 그동안 경찰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순찰함을 찾아가서 직접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그 시간에 경찰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강도를 맞던 그 시각에도 순찰을 돌았던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으며 경찰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순찰을 돌며 그들의 임무를 다하였다. 그리고 만일 강도를 맞던 그 시각에도 경찰이 우리 집 부근을 순찰하고 있었다고 한들 어찌 귀신이 아닌 이상,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경찰이 알 수 있단 말인가?     


셋째이래서야 어떻게 경찰을 믿고 국민들이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요즈음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빈번히 기승을 부리며 벌어지고 있는 강도 사건으로 인해 경찰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주야로 강도를 검거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더구나 이곳 우리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파출소장(파출소장 이름까지 밝혔음)은 우리 마을의 치안을 위해 가정을 지척에 두고도 한 달 이상이나 가정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밤낮으로 고생을 하며 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뜩이나 피로에 지칠 대로 지친 경찰들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주거나 보답은 못해줄 지언정, 그런 식으로 경찰을 매도하고 깎아내린다면, 그다음부터는 정말 국민들은 누구를 믿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우리 마을을 담당한 파출소장은 신문이나 방송에 우리 집 강도 기사가 나갈 때마다 시경찰국 등, 상급기관에 불려가서 그때마다 혼쭐이 나곤 한다니 그 역시 경찰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래서야 어떻게 경찰들이 자부심과 의무를 느끼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나 혼자만의 좁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점은 경찰 당국이 지양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처럼 고생을 하고 있는 파출소장에게는 질책보다는 오히려 표창장을 수여하여 경찰들의 사기진작을 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대강 이런 내용을 급히 써서 모 신문사로 우송했다. 그리고 2, 3일 뒤(그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었기에 우편으로 2~3일이 걸림)의 일이었다.    



  

저녁때 퇴근을 하고 막 집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저 앞에서 반갑다는 듯 기쁨에 들뜬 힘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구, 형님, 지금 퇴근하는 길이세요?”      


알고 보니 그는 다름 아닌 파출소장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대할 때마다 잔뜩 일그러진 우거지상이 되어 기분 나쁜 말만 쏟아붓던 그가 오늘은 영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파출소장이 나에게 ‘형님’이란 뜻밖의 호칭을 사용하다니!      


“……?!”     


난 백 팔십 도로 완전히 달라진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가 무섭게 손에 둘둘 말아쥐고 있던 신문을 급히 펼쳐 보이며 한껏 헤 벌어진 아주 밝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여길 좀 보세요. 여기 제가 신문에 나왔잖아요. 이게 다 형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가 펼쳐준 신문을 대충 살펴보니 내가 신문사로 보낸 글이 제법 크게 나와 있었다. 기사가 크게 실린 것을 보자 나도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파출소장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오늘따라 우리 집으로 잠깐 들어가자고 양해를 구하였다.   

집으로 들어온 파출소장은 내 손을 여전히 꼭 잡은 채 놓지를 않았다. 그리고 경찰들은 원래 자신의 신분 노출을 우려해서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남에게 잘 밝히지 않는다면서 친히 전화번호와 집 주소까지 알려 주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친 형님처럼 모시고 싶으니 의형제를 맺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 의형제를 맺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 지금처럼 그냥 가끔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신문의 힘이 이처럼 크게 작용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 뒤부터는 신문 덕분에 그처럼 매일 파출소장에게 들볶이던 한 가지 시름을 덜게 되었다. 아니 시름을 덜 정도가 아니라 그처럼 두렵기만 하던 파출소장이 그렇게 가깝고도 살갑게 나를 대해줄 수가 없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드디어 강도를 검거하다     


그 악몽 같았던 강도 사건이 일어난 지 약 보름 만에 우리 집 강도가 모두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들 세 명 모두가 인천에 있는 어느 교도소에서 같이 복역을 하던 교도소 동기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 버릇 개에게 주지 못한다고 하더니,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불과 닷새 만에 우리 집을 타킷으로 정하고 다시 강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실로 간 큰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집이 타킷이 된 까닭은 우연히 TV를 보다가 지난 2월 28일 자로 우리 집이 TV에 나오는 장면을 보고 그들의 눈에 제법 있는 집처럼 보여서 다시 강도질을 하게 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들 모두가 25~30세 미만의 앞 길이 창창한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었다. 




결국, 나는 희망에 마음껏 부풀어 집 한 채를 고생을 하며 그럴듯하게 지어 놓고 그 집에서 채 1년도 살아보지 못하고 영광스럽게(?) TV 출연을 하게 되었으며, 방송에 나간 지 약 이틀 뒤에 강도를 맞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말았던 것이다.     

 

아내는 그때의 충격으로 그 뒤에도 자주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틈만 나면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에 누워 앓곤 하여 병원에 다니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그 강도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불행하게도 뇌종양까지 걸리게 되었다.      


강도가 검거되자 그동안 우리 집에서 주야로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들도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이제야 좀 숨을 쉬며 살 것 같았다. 속이 다 후련하고 그만해도 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 파출소장에게서 더욱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신문에 난 기사로 인해 바로 승진하게 되어 서부경찰서로 전보 발령을 받고 근무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신문 기사 하나로 인해 승진 발령을 받게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펜의 힘이 이처럼 크다는 것도 난생처음 실제로 느껴보기도 하였다.     

  

한때는 셋방살이가 부러웠다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사실 집을 새로 짓고 살아본다는 일 역시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을 짓다 보면, 마음먹은 대로, 그리고 공사 공정대로 그대로 집이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집을 짓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공사 일정이 연장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 당초에 얼마가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건축비보다 훨씬 더 들어가곤 하였다.   

   

그래서 수시로 설계사가 나를 만나보자는 연락이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덜컥 겁이 났다. 당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공정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다며 그때마다 건축비를 더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은 집을 짓다가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고, 그때마다 번번히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어서 짜증이 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을 짓는 동안의 주변 집들의 민원, 그리고 집을 다 지었다 해도 그다음에는 감리들 역시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승인을 해주지 않아 준공이 떨어질 때까지 여간 속을 썩이게 되는 게 아니었다. 당초에 구입한 집에서 그대로 살 일이지 내가 왜 건방지게 새로 집을 짓게 되었나 후회를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막상 준공이 떨어지고 난 다음에 집에 들어가 산다고 해도 그대로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집은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었다.  

    

공사 부실로 인한 누수와 전기 배선, 정화조 등, 다섯 가구가 한데 어울려 살다 보니 심심치 않게 여기저기에서 귀찮은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다. 그때마다 업자를 따라다니며 견적을 내야 하고 각 가구마다 쫓아다니며 그들이 요구하는 공사를 해주다 보니 짜증이 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출판사에서는 원고 청탁을 받았기에, 그리고 고료까지 미리 받았기에 써야 할 원고는 여전히 산더미처럼 밀려있는데 직장은 나가야 하고, 저녁때 집에 오면 부실공사로 인해 신경을 써야 하니 즐거운 나의 집이 아니라 정말 웬수 같은 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집을 공연히 지었다고 후회를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어느 날인가부터 남의 집에서 세를 사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편안히 방세만 내고 살아가다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주인에게 요구만 하면 주인이 모두 다 알아서 처리해 주곤 하니 얼마나 편한 일이란 말인가!    

  

헌신짝처럼 새집을 팔아 버리다      


난 결국 며칠을 생각다 못해 집을 팔아버리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집을 팔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집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부터는 셋집에서 편안히 살면서 혹시 집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주인에게 편하게 요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끔찍한 강도를 맞았기 때문에 그 집에 대한 애착과 정이 떨어질 때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집을 내놓기가 무섭게 집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강도를 맞은 3월 말경에 멀쩡한 새집을 팔아버리고 큼직한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어 그때부터 마음먹었던 대로 셋집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하고 편할 수가 없었다. 집을 판 가격은 1억5백이었다. 


그 당시의 1억5백은 꽤 큰 거금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9월 17일은 역사적인 88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던 해였다. 그러자 집값이 불과 몇 달만에 갑자기 수직 급등하여 내가 팔아버린 집은 놀랍게도 2억4천5백으로 껑충 뛰고 말았다. 그렇게 급등할 줄은 꿈에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도 있더니 내게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만 셈이 되고 말았다.


돈을 벌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몇 달만 잘 버티었어도 그 당시에 무려 1억4천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손해보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후회해 봐도 이 미 엎질러진 물이요,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셋집이 좋은 줄로만 알았더니 한동안 살아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셋방살이의 설움이라더니 셋방살이 역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단독 주택을 전세로 들어갈 때는 으레 주인이 살고 싶을 때까지 마냥 살라는 말만을 철석같이 믿고 계약을 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주인의 마음이 달라졌는지 집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커서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전세를 올려주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요구였다.    

     

처음에 전세로 얻게 된 집은 집이 너무 넓고 컸다. 그래서 난 두말하지 않고 올려줄 돈도 없지만, 비록 작은 집이라 해도 지금의 전세금으로 들어갈 집으로 나가겠다고 하고 그 집에서 꼭 1년을 살고 그 집을 나와서 바로 다른 집을 전세로 얻게 되었다. 그 역시 몹시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두 번째 단독주택을 얻게 되었다. 이번에도 주인에게 내가 오래 살고 싶다고 하였더니 이번에도 싫증이 날 때까지 얼마든지 마음 놓고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안심을 시켜주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말만 믿고 마음 놓고 1년을 살다 보니 이번에도 그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 집을 허물고 새로 지으려고 하니 부득이 나가야 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속이 상하긴 했지만 힘없는 백성이어서 어쩔 도리 없이 주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글을 마음놓고 쓸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새로 지은 멀쩡한 집을 팔아버린 결과 1년마다 셋집에서 쫓겨다녀야만 하는 설움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세로 몰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새집을 팔고 큰돈을 잃은 것만 해도 서운하고 억울한데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가야 하는 번거로움과 짜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바로 작은 집을 얻어 나가기로 하고 그 집에서 쫓겨난 다음 세 번째 전셋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것은 비록 아무리 허술하고 불편하고 좁아도 내 집만큼은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집에서 세를 살면서 틈만 나면 늘 내 집을 도로 가져야 하겠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 그때 홍제동 일대가 재건축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운이 좋았는지 아주 작으면서도 허술한 집 한 채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구입한 지 약 3년 만에 새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다. 80년대 말, 그 작은 집은 아마 6천8백여만 원을 주고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집에 입주한 지 약 2년 뒤에는 그 집값이 무려 2억 원으로 성큼 뛰었다. 


그게 현재 홍제현대아파트였다. 만일 그때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집 한 채라도 구입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까지도 남의 집 셋방살이를 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기만 하다.    

  

결국, 난 조금 젊었을 때, 큰 꿈을 품고 그럴듯한 집 한 채를 짓고, 게다가 뜻밖의 분수에 넘치는, 그리고 허울 좋은(?) 방송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대낮 강도도 맞아보고 전셋집에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인생 공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        


    (우리 집 강도 사건 사례 끝)      


   - 다음 회부터는 다른 집 강도 사건 사례가 두 번에 걸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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