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비극, 그리고 달라진 언어의 비극(70)]
아침 식사를 마친 성길 씨네 세 식구가 오늘도 산책길에 나섰다. 제법 선선한 공기가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다.
성길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히야아, 이젠 제법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도 불어오고 ①산뽀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인걸. 날씨가 이렇게 선선할 걸 보면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나 봐.“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아내가 대꾸했다.
”그럼요. 처서가 내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선선할 때도 됐죠. 그나저나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 지내기는 좋은 계절이 돌아온 거죠 뭐.“
”내일이 벌써 처서라고? 벌써 그렇게 됐나? 그리고 가을이 오면 지내기 좋다니 그건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우선 전깃세가 덜 들어가게 되잖아요.“
”아하, ②랭풍기를 돌리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인가?“
”그럼요. 아무리 절전형이라고 해도 하루종일 켜면 전기 요금이 꽤 많이 나오던 걸요.“
아내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더니 갑자기 깜짝 놀란 듯 밤나무들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여보, 저 밤송이들 좀 봐요. 밤송이들이 어느 틈에 벌써 저렇게 커졌네요.“
길가 밤나무들에서는 아직 덜 익은 큰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러자 성길 씨도 문득 밤송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와아— 정말 저런 걸 보면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그리고 얼마 전에 누구를 봐도 세월이 정말 너무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겠더라고.“
”누구라니요? 그게 누군데요?“
”왜 전직 대통령 있잖아.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건강한 몸으로 ③ 18공알치기를 하러 다니던 분이 이젠 아주 몰라보게 딴사람이 됐더군.“
”아하, 그분 말이군요. 저도 티비 뉴스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그만큼 늙어가고 있는 거라고요.“
”아무렴. 늙어가고말고. 그러니까 그 누구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잖아. 어엉? 여기 도토리 떨어진 것 좀 봐. 우리 오늘은 도토리나 주워다가 묵이나 쑤어먹을까?“
성길 씨가 얼른 허리를 굽혀 도토리를 주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길가에는 벌겋고 탐스럽게 익은 도토리가 여기저기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어머 그러게요. 도토리도 이렇게 많이 떨어져 있었네. 그런데 내가 도토리묵을 쑬 줄 알아야지요.“
”모르면 배우면 되지 뭐. 요즈음 ④손전화기를 보면 안 나오는 게 없잖아. 혜영아, 너도 좀 같이 주울래?“
”응, 알았어.“
성길 씨의 말에 혜영이도 신바람이 나서 도토리를 줍기에 정신이 없었다. 도토리는 금세 한 움큼씩 되었다. 줍는 대로 호주머니마다 넣다 보니 호주머니도 금세 불룩해지고 말았다.
도토리를 열심히 줍고 있던 성길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내 바지 양쪽 ⑤골왕마다 꽉 찼으니 어쩌면 좋지? 이럴 줄 알았으면 ⑥박막이라도 하나 가지고 왔으면 좋을 걸 그랬잖아.“
”누가 이럴 줄 알았나요. 할 수 없지 뭐. 다음에 다시 주머니라도 들고 와서 줍도록 해야지. 도토리가 이렇게 많이 떨어진 걸 보고도 그냥 가자니 정말 아깝다!“
그러자 혜영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소리쳤다.
”엄마, 그럼 내가 지금 집으로 달려가서 가지고 올까?“
”아니야. 그 먼 데를 네가 언제 가서 가지고 오니? 오늘은 그만 줍고 다음에 줍는 게 낫지.“
”아니야. 그새 누가 주워가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엄마와 아빠는 여기서 줍고 있고 내가 금방 뛰어가서 가지고 올게.“
”글쎄 그만두라니까. 엄마가 도토리묵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잘 모르니까 그냥 두란 말이야.“
그러자 이번에는 성길 씨가 나섰다.
”아니야. 혜영이가 얼른 가서 가지고 오게 그냥 둬. 내가 그동안 ⑦간봉을 구해 가지고 와서 나무 위로 힘껏 던지면 더 많이 떨어질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엄마하고 나는 그동안 도토리를 줍고 있을 테니 ⑧날래 갔다가 오렴.“
”응, 알았어. 내가 집에 갔다가 오는 동안 많이 주워놔야 돼. 알았지?“
혜영이는 이렇게 대답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성길 씨가 마침내 길다란 간봉 하나를 주워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도토리나무 꼭대기를 향해 힘껏 간봉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성길 씨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급한 마음에 간봉을 힘것 던지다가 그만 발목을 삐끗했던 것이다. 아내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성길 씨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여보, 괜찮아요?“
”응, 다리를 좀 삔 것 같은데 이걸 어쩌지? 당장 ⑨골외과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꼼짝도 할 수 없으니 말이야.“
”그래요?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 이걸 어쩌면 좋지? 이런 일로 119구급대를 부르기도 그렇고…….“
”조금만 기다려 봐. 이러다가 좀 나으면 걸어보지 뭐.“
두 사람은 서로 붙어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이 된 채 발목이 낫기만 기다리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뜻밖에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가 일어난 날이었다. 그 모두가 도토리 때문이 벌어진 일이었다. ( * )
① 데이트 ② 에어컨 ③ 골프 ④ 휴대폰 ⑤ 호주머니의 함경도 사투리
⑥ 비닐봉지 ⑦ 막대기, 몽둥이 ⑧ 빨리 ⑨ 정형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