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주제로 한 명시 감상

[추억에 잠기는 시간]

by 겨울나무

◆ 病惡語


가을은 슬프다고들 한다.

추풍이라든지 낙엽이라는 하는 것이

우리에게 비애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할 것도 없거니와 벌레 소리,


그중에 밤새도록

머리맡에 썰썰거리고 우는 실솔(歷韓; 귀뚜라미)의 소리도

어째 세월이 덧없음과

생명과 영화도 믿을 수 없음을 알리는 것 같이

여름에 자라고 퍼져 싱싱하게 푸르던 초목이

하룻릇밤 찬 서리에

서리를 맞아 축축 늘어지는 꼴은

아무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난데 없는 찬 바람이 뒤를 이어

누렇게 말라 버린 나뭇잎을

그냥 떨어 버리는 것만 아니라

이리 날리고 저리 날려

지접할 곳이 없이 휘몰아 가는 소리는

사람을 잠못 들게 한다.


< 李光洙 >


◆ 들국화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가는 풀밭에

팔베게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 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 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문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닲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은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만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닮은 계절인 것이다.


< 鄭飛石 >


◆ 낙엽(落葉)을 태우면서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이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 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 李孝石 >

◆ 금삼(錦衫)의 피

사위(四圍)의 경색(景色)이

연산의 마음을 초창하여

만드는 것이다.


부는 바람, 떨어지는 낙엽,

산에 가득 붉고 누른 단풍,

잎사귀와 잎사귀!

여기에다 때는 또다시

으스름 황혼이 되어간다.

봄 계집, 가을 사나이다.

아무 한없는 무심한 사람이라도

가을 소리, 가을풍경을 대하면

공연히 마음이 흔들거리니,


하물며 정과 물로 엉켜지고 뿌려진

어마마마의 피눈물 흔적을 살라 문구고

난 젊은 상감 연산이 시랴!


< 朴鍾和 >



◆ 슬픈 가을밤


가을밤은

왜 이렇게 길고 길까요?

울고 싶은 밤,

누구의 노래를 듣고 싶은 밤이외다.

< 노자영(盧子泳) >

◆ 산책(散策)


원근(遠近)의 저 선명한 산빛이

드높아진 하늘이

또 어디서 들려올 것만 같은 밤

아람 버는 소리가

나를 자꾸 유혹해 낸다.


머루랑 다래, 으름이랑 열리는 산골에서

적수(適水)를 맞는 것 같은

정숙의 경(境)….

가야금 소리가

맑을 대로 맑아지는 이 계절은

진정 한스러운 여인네의 몸짓 같아

나는 건드리기를 겁내며

성(城) 밖으로 기척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노천명(盧天命) >



◆ 가을날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가을이거니

오랫 동안 마음에 살고 있던

행복된 생각도 서러움도

이제 먼곳 향기에 녹아 사라졌다.


잔디 풀 태우는 연기 들에 나부끼고

그 부근에서 노는 마을 애들

지금은 나도 끼어 노래 부른다

노래하는 애들을 따라 소리를 맞춰.


< H. 헤세 >




◆ 가을 바람에


가을 바람에 나무는 흔들리고

촉촉히 밤은 야기 (夜氣)에 젖고 있다.....

바람은 나뭇잎에 떠들썩 대고

전나무는 가만히 속삭이며 말한다….


< H. 하이네 >


◆ 가을날


주여 어느덧 가을입니다

지나간 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

태양 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눕히고

광야로 바람을 보내 주시옵소서


일년의 마지막 과실이 열리 도록

따뜻한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 주십시오

과실이 익을 대로 잘 익어

마지막 감미가 향긋한 포도주에 깃들 것입니다.

지금 혼자만인 사람은

언제까지나 혼자 있을 것입니다

밤중에 눈을 뜨고 책을 읽으며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 불안스러이

가로수가 나란히 서 있는 길을

왔다 갔다 걸어다닐 것입니다.

< R.M.릴케 >


◆ 가을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아슬한 곳에서 내려오는 양.

하늘 나라

먼 정원이 시든 양.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무거운 대지가 온 별들로부터

정적 속에 떨어집니다.

우리도 모두 떨어집니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집니다.

그대여 보시라,


다른 것들을

만상이 떨어지는 것을 하지만

그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낙하(落下)를 무한히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십니다.


< R.M. 릴케 >



◆ 병든 가을


황금빛으로 병든 가을아

버들 강변에 청풍 일 적이면

너 가을아, 너는 죽으리라

능금 밭에 백설이 찾아올 때면…….


가엾다. 가을아

너 백설 흰 빛깔 속에 죽을지어다

풍성한 과일의 성숙 속에

하늘 속

소리개 돌고

꿈꾸는 처녀인 양

초록머리 소나무 위에

머얼리 노루가 운다.

검은 숲가에서

계절이여

사람도 없는데

떨어지는 과실과

몸으로 우는 수풀과 바람을

나는 사랑한다

흐르는 눈물 낙엽이여!

짓밟히는 낙엽이여!

기울어 가는 기차여!

흘러가는 목숨 들이여!


< G. K. 아폴리네에르 >



◆ 만추(晩秋)

근심스러운 구름이며

가을 바람 홀로이기에

나는 헤매 다닌다


고목에는 새도 노래 하지 않고

아아 고요함이여, 쓸쓸함이여!

죽음의 추위에

겨울은 가까이 온다

지금은 어디 있느냐,

수풀의 기쁨 어찌하였느냐,


그 전날 들판에

물결치던 금빛 벼 이삭들

해 저물자 날이 추워졌다

안개는 자욱히 목장을 덮고

발가이의 숲으로 몰려간다

향수여

모든 것이 달아나는구나.


<N. 레나우 >




◆ 가을


가지에서 가지로 건느는 바람은

명랑한 여름과 어두운 날에

검은 부엉새의 흰 비둘기 우는

노목의 가지 끝을 흔든다.


나무 잎새에 뚝뚝 지는 빗소리의

조용하고도 울적함은

떠도는 몸에 한 걸음 한 걸음

슬픔의 흐느끼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파랑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빨강으로

또 황색에서 황금의 빛으로

나무마다 가지가 늙어지면

나는 가을에서 가을로 지는

내 과거를 생각한다.


< H 레니에 >


◆ 가을

지금은 가을,

가을은 네 마음을 찢는다

날아가라! 날아가라!

태양은 산을 향해 기어 올라가며

발걸음마다 쉬곤 한다.


아, 이 세상은

이처럼 시들어빠졌는가

시달려 늘어진 줄 위에

바람은 그 노래를 켠다

희망마저 달아났다

바람은 그것을

애석해 하며 탄식한다.

< F. W. 이체 >



◆ 추풍(秋風)



가을 바람이 불어오네

휜구름 날아가네

초목은 황락(黃落)한데

기러기는 남쪽으로

난초가 빼어났다


국화도 향그럽네

가인(佳人)을 이끌어 잡네

잊지 못할 건 정이어라.

배를 띄우자

저 하수를 건너자

중류(中流)에 비꼈네


출렁이는 소파(素波)여

피리를 불고 북을 쳐라

불러라 도가(棹歌)를

환락(歡樂)은 극에 달했구나

애정(哀情)으로 바꿔진다.

젊었을 때가 언제던가

늙는 걸 어찌할까


< 한무제(漢武帝) >


◆ 밤

이슬지는 가을 밤 홀로 거닐면

시름에 쌓이는 나그네 마음

멀리 배에서는 등불이 새어 오고

초생달을 두들기는 다듬잇소리


< 두보(杜甫) >


◆ 추야독좌(秋夜獨坐)


빈 방에 홀로 앉았으면

늙어감이 서러웁다

이경(二更),

밖에서는 찬 비가 내리고

어디선지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무엇일까?

벌레가 방 안에 들어와 운다.


< 왕유 (王維) >


◆ 추래(秋來)


오동에 바람 이니

벌써 가을인가.

꺼져기는 등불 밑에

귀뚜라미 눈물을 짜개질 하는 밤


누군가?

나의 서러운 한 권의 시집을

소중히 읽어 벌레 먹지 않게 할 이

삶은 에처러워 창주 곧추서는데

차가운 비 타고 찾아 오는

어여쁜 얼아!

가을의 무덤 속,

나는 죽어 포조(觀照)의 시를 외고

피도 한스러워 천년을 푸르리다.

< 이하(李賀) >


◆ 가을밤


우물가에 오동잎새

바람에 나부끼고

옆집 다듬이 소리

가을이 분명코나


처마 밑에 홀로 누워

어렴풋이 홀로 조을 때

머리 맡에 달빛이

소리 없이 흘러든다.


< 白天 >


◆ 가람문선

들마다 늦은 가을

찬 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 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두고

젖먹는 어린 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 이병기(李秉岐 >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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