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께서는 우울이란 감정을 주셨을까

의미 있는 삶, 자기 초월

by 댑댑

우울은 슬픔과 다르다.

무기력과 완전한 동의어도 아닌 듯하다.

우울감이 주는, 차가움은 격정적이지 않다.

한 없이 잔잔하지만, 한 없이 무겁다.


신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인간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도록 부여했을까.

진화론으로 보면

우울을 느끼는데 어떠한 생존에 유리한 면이 있었을까.


지루함과도 다르다.

지루함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울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삶의 대전제인, 살아갈 의미가 존재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지루함은 무언가를 찾지 못했지만, 행위를 할 의지가 있는 상태라면

우울함은 그 의지조차도 없다는 것이 차이겠지만.


처음엔 이 감정의 실체를 알지 못해, 한없이 발버둥 칠 뿐이었다. 벗어나기 위해서.

하지만 늪과 같이, 발버둥 치면 더 깊게 들어가는 게 우울이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체념일지도 모르지만,

끝없이 빠져보기로 했다.

바닥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히려 요동치던 마음은 잔잔했다.


이때 느낀 감정은 사실 말로 전부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차가움에 몸이 식는 걸 느끼며, 모든 열정, 감정, 밝음을 가진 모든 것들의

빛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그 과정.

그러나, 그만큼 자유롭기도 하다.

감정에서, 행복에서.

한 없이 공허하지만, 평화롭다.


쾌락주의, 종교, 실존주의, 아니면 고대의 수많은 철학들의 주목적은 결국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형이상학마저도.

행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 가에 따라 반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천주교 신자인 입장에서, 고민해 봤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신론, 불가지론에서의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의 모상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감정과 이성이 결국 신께서 부여해 주신 거라면

우울도 감정이고, 이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깊게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신을 언제 찾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왔을 때이다.


우울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관조하게 된다.

세상에 의미가 존재했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과연 신을 바라보려 노력했을까.

종교가 탄생했을까.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


우울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렵다.

카뮈가 그의 저서인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을 스스로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부조리라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신을 말하고,

실존주의자들, 아니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근본적인 이유는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서 파생된 우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러한 생각도 해봤다는 정도로 봐주면 감사하겠다.


나는 우울한 사람들을 위해, 나를 위해서도, 기도할 뿐이다. 부조리라는 불합리에는 또 다른 '신'이라는 불합리로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수많은 우울한 사람들이,

스스로 의미를 세우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힘을 주시길 바랄 뿐이다.

고통의 신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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