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2
오랜만에 글을 쓴다.
학기가 끝나면,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학이 거의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서도
내가 쓰려 마음먹었던 글은 이게 처음이다.
고통, 성장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공부, 세상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라 정의했다.
지루함, 앞으로 발걸음을 떼기 위한 본능적 감정이라 납득했다.
공허함, 삶의 대의를 찾지 못했을 때 오는 허무함이라 겨우 답을 내린 듯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모르겠다.
얄팍한 정의의 천으로,
공허함의 가시를 부드럽게 덮었다 생각했으나
나는 이제는 무엇을 덮었는 지조차 알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때는, 그 시절만의 아픔들이 있었지만
내면에 가시를 품고 살진 않았다.
뾰족한 게 내 안에 돋아나기 시작한 시점부터,
찔려서 피가 나기 시작했으나
지혈하는 법도 몰랐고,
가시를 다듬는 방법도 몰랐다.
그저 피하기 바빴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정답을 알았다 생각했다.
가시를 다듬는 방법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한 때는 그 답이 자기 계발이라 여겼으며,
또 다른 시절에는 종교라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라 답을 내렸다.
감히.
하지만, 이것조차도 눈가리개였을 뿐일까 싶다.
가시가 내 답을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
2번의 방학에 걸쳐 서양 철학사를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가시에 어떠한 이름을 붙였는지, 아니
그것을 가시라 생각했는지부터에 대해 알고 싶어서.
결론적으로는,
내 답이 맞았음을 확신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서양 철학사의 독후감이라 볼 수 있겠다.
1. 자기 계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선험철학, 헤겔부터 시작된 변증법의 고리.
매슬로우의 욕구이론.
나름의 정답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자기실현을 하는 것.
철학자들이 자유에 대해 논하고,
우주를 바라보고,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것
더 좋아짐을 바라고 이상향을 쫓는 것.
인간의 본능이란 생각에 내면의 반발감은 없다.
2. 종교
단테,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키르케고르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의 결정체인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과학을 공부하고,
대학교 전공도 주로 과학지식에 기반하지만,
과학도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분석철학에서 형이상학이 많은 반박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부터 시작된 무신론적 실존주의 흐름에 동감한다.
하지만, 인간이 부조리를 두 발로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람과의 연대감과 사랑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고통으로의 자유를 추구하는 불교까지.
행복이 목표라면,
삶의 목표에 대한 부재가 공허함의 원인이라 생각했다면,
이 답도 실용성은 충분히 있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내렸음에도, 마음속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다.
Q1. 세상은 불공평하다.
언어조차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죽는 것에 대해,
이태석 신부님의 암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선한 사람이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어떠한 답을 내려야 하는가.
A1.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사랑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차원에서, 대의인 선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인간인 우리 차원에서는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답에, 마음을 맡기려면 신앙의 차원으로 넘어가야 한다.
루터는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 주장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은 두 개의 날개라 표현했다.
하지만 내 이성은 내가 내린 답에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보류한다.
다만, 미사에 가고 기도를 드리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렇다면 실용주의적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파스칼의 말처럼.
결론은, 종교에 대해서는 마음을 가볍게 가져보고자 한다.
3. 아름다움
3-1) 철학
아름다움은 이데아의 모방.
고대 그리스 로마의 황금비율.
칸트의 아름다움의 정의인, 현실과 이성을 매개해 주는
이성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에 발생하는 선험적 쾌락.
하이데거의 삶은 시라는 언어에서 시작된다는 말.
3-2) 예술(개인적 관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표현된 수많은 작품들.
미술, 음악, 춤, 문학, 시 등등등
보다 보면,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
자신이 의미 부여한 세계를 공감받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예술 작품을 보고,
관객은 눈물을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어딘가에 있을 자연의 경관에 감탄하고,
빛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인간 실존의 비애를 알아간다.
고통에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느낀다.
내면에서 끌어 오르는 감정을 통해서.
3-3)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뻔한 말이지만,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악이 있어야 선을 안다.
고통이 있어야 인간은 나아간다.
아무런 내적, 외적인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가만히 있을 것이다. (지루함도 고통이기 때문이다.)
평생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들이 있다.
알을 깬다고 표현해도 좋고,
꽃봉오리가 피어오른다고 말해도,
아니면 눈물을 머금은 행복이라 정의 내려도 좋을 것이다.
공허함에 대한 방학의 여정을 마무리해야 할 즈음에
이제야 글을 쓰지만
졸려서 마지막에 급히 마무리하는 느낌도 있는데,
결론은,
모르겠다.
진짜 전혀 전혀 전혀 모르겠다.
아 몰라.
나중에 이렇게 고민한 시간들이 의미 없는 시간들만 아니기를...
제발ㅜㅜㅜㅜ
방학 다 태웠는데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