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스몰럭셔리'라는 신조어가 일상에서 많이 쓰인다. '스몰'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초고가 명품은 아니지만, 평소에 선뜻 구매하지 못했던 고가의 상품을 구매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호캉스, 오마카세, 파인다이닝 등 보통의 숙소나 식당보다 호화로운 서비스를 즐기거나 고가의 캠핑장비, 와인잔, 그릇(요새는 디너웨어라고 부른다고..) 등을 구입하는 것 등이 모두 스몰럭셔리의 일환이다.
호캉스라는 단어가 유행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지독한 가성비 인간인 나는 올해 들어서야 첫 호캉스를 경험해 보았다.
엄마에게 좋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을 효심이라 칭할 수 있다면 나는 효심이 지극한 딸이다.
스무살, 첫 유럽 배낭여행을 가서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신년 퍼레이드를 보았을 때도, 파리 라데팡스 전망대에 올라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야경을 보며 세상에 이런 곳이 있구나 감탄했던 때도, 중국 리장에서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 위 자라나고 있는 신비한 나무줄기를마주했을 때도 나는 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에게는 고정 레퍼토리가 있다. 무언가 평소보다 조금좋은 걸 하자고만하면 '나는 됐다, 비싸지 않냐, 너네끼리 다녀와라' 세 가지 중 하나가 답변으로 돌아온다.
엄마랑 같이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많은데 엄마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으면 함께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걸 해주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효녀가 될 수 없나 보다.
그래도 내가 하자는 것 중 엄마가 그나마 흔쾌히 응하는 것은 여행인데, 하필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해보려는 타이밍에 글로벌 봉쇄령이 내려졌다.2년 만에야활기를 띄는 공항을 보며 이제 괜찮겠지 싶어 슬쩍 운을 띄워봤으나 걱정 많은 엄마는 당분간 해외여행은 없다며 단호하다.
이 때다 싶어서 그럼 여행 대신 호캉스를 하자고 제안했더니 평소 엄마답지 않게 흔쾌히 좋다는 답을 해왔다. 웬일인가 싶어 엄마 마음 바뀔세라 부리나케 호텔을 예약했다.
그런데 흔쾌한 답변에 반색한 것이 무색하게도 예약 날짜를 통보하자마자 시작됐다. 엄마의 고정 레퍼토리. 결국은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휴 알겠어, 알겠어'하는 엄마의 확답을 받아 냈다.명분이야 어쨌든 또 성질을 부렸으니,역시나 효녀감은 아니다.
아무튼 이왕 호캉스에 대한 확답을 어렵게 받아낸 김에 판을 키웠다.자칭 6성급 호텔이라는 국내 최고급 호텔에서의 숙박에 더해 저녁으로는 국내 최고가 뷔페를,다음날 점심으로는호텔 최고층에 위치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고급스러운 곳답게 직전에 취소하면 위약금을 고스란히 물어줘야 하니엄마의 거절을 차단하기에도 아주 용이했다.
호텔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특히 평범한 가정집 공부방만한 욕실은 성공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큼지막한 욕조에 뜨끈한 물을 가득 채우고 목욕 가운에 헤어캡까지 야무지게 걸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으니 진짜 성공한 것 같기도. 여행 중 조식 뷔페만 가도 좋아하는 엄마와 드디어 저녁에도 호텔 뷔페를 갔고, 호텔 수영장에서 폼나게 사진도 찍었으며, 셰프의 설명을 곁들인 파인다이닝 코스까지 제대로 즐겼다.
호화 세계로의1박 2일 여행은 성공적이었다고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의 한마디가 나를 또 한숨 쉬게 했다.
엄마는 한 번 해봤으면 됐어~
1박2일동안 둘이서 즐긴 상품의 가치는 총86만 원.
자주 즐기기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세 달 동안 만원씩 모아 1년에 한두 번쯤은 할 수 있는 일이니 평범한 직장인 기준 스몰럭셔리를 즐겼다고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스몰럭셔리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 평소에 선뜻 구매하지 못했던 고가의 상품을 구매하며행복감을 느끼는 것.
한 푼 두 푼 모으면 아주 범접 못할 것은 아니니 가능성은 열려있되, 자주 즐길 정도는 못되니 언젠가 큰 마음먹고 구매하며 뿌듯해할 수 있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스몰럭셔리가 주는 행복감의 비결인 듯 싶다.
사랑은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상대에게 주고 싶은 것이요, 효심은 자식의 부모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면 나의 효심은 '내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다.
성공한 연예인처럼 부모에게 집을 사줄 수도, 카페를 차려줄 수도, 차를 뽑아줄 수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에게 '스몰럭셔리'는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되어준다.
큰 마음먹고 준비한 좋은 것들을 엄마와 함께 누리는 순간, 열심히 일한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그렇게 내일을 살아간다.
호캉스며, 파인다이닝이며, 한 번 해봤으면 됐다는 엄마에게 말해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고. 그러니 미안하지만 앞으로 딸의 행복에 적극 협조해주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