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밑바닥까지
할아버지와 차에서 내리기 전에도 자식 자랑에 갈길이 멀어 보였지만 여기까지 태워주셨으니 마저 듣고 내린후 다시 걸었다. 이제 들고 있던 물도 다 마셔서 입이 바짝 말라왔다. 차를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다. 그것도 그런 것이 정말 도로와 허허벌판의 길에서 동양인이 세워달라고 하니 이상했겠지. 차를 세우다 이런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다 먹은 페트병을 지나간 차를 향해 던졌다. 그런데 가던 차가 갑자기 정차를 하는 것이다. 앗차 패트 던지는 걸 본 걸까..? 그래도 일단 차가 섰으니 다가가서 또 왜 쳤다.
그때 그 사람의 놀란 표정도 기억이 날 듯하다. 자신은 서핑을 하러 가는데 멜버른 방향으로 또 가다가 세워주겠다고 했다. 어찌 되었건 차를 타고 한참을 또 갔다. 조금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서 갈림길이 나왔는데 자신은 다른 길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멜버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젠 정말 깜깜해졌다. 차도 없다. 여긴 정말 어딘지도 모를 끝없는 어둠으로 계속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나 많이 걸었는데 도로에 휴게소 따위도 없었다. 정말 드넓은 평야와 나무만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었다. 이젠 내 눈앞 몇 발자국 앞만 보이는 정도의 어둠이 깔린 무렵, 저 멀리 밝은 인공의 불빛이 보였다.
이미 지쳐버린 몸이었지만 걸음이 빨라졌다. 가서 여기가 어디였던 건 간에 돈이 얼마가 들건 간에 택시를 불러달라고 해야겠다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멀리서도 보였던 불빛이 가까워진다. 이젠 눈물이 다 날지경이다. 규모가 있던 주유소였다. 편의점 같은 것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차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이 가게로 들어오니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나는 주인장에게 대뜸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택시를 불러달라 나는 멜벌에 가야 한다고 외쳤다. 지친 몸과 마음에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정말 택시 부를 거냐는 말에 나는 물론이다. 바로 불러달라고 얘길 하는 와중에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지쳐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무심하게 자신이 멜버른을 가니까 타고 가라 했다. 어디에서 오시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무조건 오케이다. 차를 타고 가며 영어를 잘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가는 길에 차에서 연기가 났는데, 아저씬 괜찮다면서 길에서 잠시 쉬었다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다 잠시 이야기가 끊겼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깨우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여기 멜버른 근처니까 저쪽 주유소에 가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두 번째 주유소에 들어가서 혹시 택시를 불러줄 수 있냐고 하니, 가게 주인은 그걸 나한테 시키냐는 표정으로 저기 공중전화가 있으니 전화하랜다.
그래서 전화를 하려 하면서 혹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사장님은 한숨을 쉬며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하는 표정으로 자기가 불러주겠다 하며 어딘가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러주었다. 그리곤 얼마 되지 않아 택시가 왔고 그 택시를 타고 다시 숙소로 올 수 있었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 트럭 아저씨가 데려다준 것이다.
숙소 침대를 보자마자 바로 누웠고 한참을 잤다. 일어났을 땐, 몸 마디마디가 부서질 듯 아팠다. 아마 8시간 가량 걷고 차를 2시간 정도 얻어 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의 어두워진 도로와 내가 걸어가던 길이 기억난다. 그렇게 길 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도착한 마을에서 충분히 물어보고 이동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그냥 그 동네에서 하루를 보냈어도 충분했었을 텐데 말이다.
그 뒤의 여행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여행에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무섭게 생기고 어떤 부탁도 안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이라도 여행객이 길을 못 찾거나 어려움에 봉착하면 모두들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 사람을 판단했고 나를 스스로 어려움에 빠뜨렸었다는 생각을 했던 날이었다.
이 뒤로의 여행은 더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 여행 초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