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모습들..
대게 방학 기간을 맞이해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 2월 중순 즈음되면 시드니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호주로 오기 전 나의 여행 코스는 시드니에서 남부로 그리고 북부로 가서 동쪽을 훑으며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다만 타운스빌에서 크게 재미를 못 보고 동부의 대부분을 건너뛰다 보니 시드니로 돌아왔을 땐 2주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낯가림도 많이 줄고 일정이 맞아 같이 다니던 녀석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나도 함께 이야기할 기회들이 많았다. 여행의 막바지에 두리 하우스로 들어오고 한국으로 돌아갈 땐 숙소 옥상에 나와 함께 맥주도 마시고 즐거운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마지막 2주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시드니 구석구석 더 다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이동하는 것이라 헤맬일도 없고 가는 길에도 심심하지 않았다.
유독 친해진 두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한 분은 조용한 편이었고 다른 한 분은 정말 유쾌했다. 어떻게 둘이서 여행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분들과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호주 카지노를 방문했을 때이다.
카지노를 갈 땐 밤에 가야 하니 두리 하우스에서 저녁을 먹다가 마음에 맞는 분들과 함께 이동을 했다. 그날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두리 하우스에 떠돌던 카지노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카지노에 여권을 보여주면 코인 10달러를 주는데 그 10달러를 가지고 2000달러 정도를 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바로 차를 구매했고 여행을 더 알차게 보냈다면서 카지노를 가는 내내 나에게도 그런 잭팟을 터뜨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갔다.
다 같이 줄을 서서 여권을 보여주고 10달러치를 받은 다음에 슬롯머신으로 갔다. 다른 건 전혀 뭔지 몰랐으니까.
문제는 슬롯머신도 하는 방법을 몰랐다. 버튼 4갠가 있었고 레버 같은 것을 당기면 흔히 우리가 아는 그림들이 위로 막 올라간다. 그러다 멈춰 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버튼을 막 누른 뒤에 다시 한번 당겼는데, 이번엔 마지막 구석에 있는 버튼이 뭔지 몰라 눌러봤는데 아마도 누적되어 있는 돈을 꺼내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기계는 나에게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았지만 10달러 중 7달러를 하고 나머지 3달러를 꺼낸 나에게 동전 3개를 무심히 툭 던지듯 오른쪽 다리 쪽에 떨어뜨려주었다.
지금은 10달러 중 게임을 하지 않은 3달러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지만, 기계에서 나에게 돈을 주다니!! 하면서 이건 기회다 싶어 더 하려던 찰나에 그 두 누님들이 와서
"야 가자!"
했다.
이런 거 재미도 없고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돈 맛(?)을 봐버린 나는 더 하려 했지만 빨리 가자는 성화에 다시 못 올 카지노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와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알지도 못하는 걸 왜 붙잡고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일정은 시드니 병원 앞에 돼지 동상의 코를 만지면 복이 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너무 신나 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찾아간 곳의 멧돼지 동상은 이미 코 부분의 칠이 많이 벗겨져 있었다.
사진은 아마 그 조용했던 분이 찍어 주신 듯하다. 이 분 들하고 몇 날을 함께 다녔는데 사진이 많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네..
마지막 에피소드는 두리 하우스는 철저하게 남/여를 구분하여 방 배정을 하는 줄 알았는데, 누나들 방에는 네덜란드에서 온 여행객이 있었다.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일을 하다가 돈이 모이면 여행을 다니고 또 어딘가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볼 때마다 코가 루돌프 사슴처럼 빨겠는데 한국말로 많이 놀렸던 것 같다. 막 놀린 것은 아니고 가끔씩 코를 보고 웃으면서 한국말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어설픈 영어로 호구 조사를 해도 웃으며 다 대답해 주고 못 알아들을까 봐 천천히 이야기도 해주고 했던 배려 깊은 형님이었다. 그래서 줄 것은 없고 가방에 있던 그때 한창 유명했던 "Banga Banga Hamtori (방가방가 햄토리)" 볼펜을 선물로 줬는데 그분이 받고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방아방아 함토리?"
그 말이 어찌나 귀엽고 웃기던지 나도 모르게 빵 터져 웃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당연히 여겼던 방가방가 햄토리가 그렇게 읽히다니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을 많은 한국 분들이 시드니의 두리 하우스에서 지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저녁을 먹다가 맥주를 사둬야겠다는 단합을 하면 돈을 조금씩 모아 1~2짝을 샀다. 킹스크로스는 밤이 되면 더 활발해지는 거리였기에 두리 하우스 옥상에서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때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만난 지 몇 시간을 보낸 형님들에게 어쭙잖은 푸념과 걱정을 털어놓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술판이 벌어진 옥상에 사람들이 뭔가 하고 올라오면 맥주 하나를 꺼내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행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라 했다.
시드니 어디를 돌아다닌 것보다 두리 하우스의 옥상에서 오간 많은 이야기와 웃음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결국 여행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야 말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때 제 이야기를 들어주며 걱정해 주셨던 형님이 한국 가면 연락하라고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셨는데 한국 와서 잃어버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본인들의 앞으로의 걱정보다 어린 녀석의 작고 작은 고민을 깊이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다시 한번 호주 여행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