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나는 금년 마흔 넘은 미혼 아줌마입니다.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이뿐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 났군. 동생을 빼놓을 뻔했으니…….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이 곱게 생긴 우리 어머니는 금년 나이 칠십칠 살인데 과부랍니다. 이 나이에 과부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 건지는 잘 몰라도, 하여튼 아버지가 없으니 ‘과부’가 맞지요.
외할머니 말씀을 들으면 외할머니 댁은 대학가에서 하숙을 치셨답니다. 안채, 별채까지 총 5개의 방에 하숙을 치고 부엌 딸린 문간방엔 세를 줬대요. 하숙집 이름은 ‘이문 하숙’ 동네 꼬마가 ‘ㅁ’ 자에 낙서를 하는 바람에 나중에 ‘이뿐 하숙’이 됐답니다. 가끔 이 낙서된 간판을 보고 ‘뭐가 이뿐 가?’ 궁금해서 찾아온 학생들도 더러 있었대요.
외할아버지는 복덕방에서 점 백짜리 화투를 치다가 학생이 방을 구하러 오면 집으로 데리고 왔대요. 뭐, 원조 삐끼랄까. 외할아버지 직업이 그렇다 보니 외할머니는 맏사위 감만큼은 직업이 튼튼한 놈으로 내가 직접 고르자 해서 하숙생들을 눈여겨봤대요. 다들 대학생이니 나중에 취직 걱정은 없겠다 싶었죠. 하지만 어머니는 거들떠도 안 봤대요. 누가 서울깍쟁이 아니랄까 봐 다들 짜리 몽땅에 시커멓고 촌스럽다고 싫다 했대요. 외할머니가 겉껍데기가 무슨 소용이냐고, 서방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고 했지만 들은 체도 않더래요. 그래도 외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대요.
그러던 어느 날 대구 과수원 집 막내아들이 새로 들어왔대요. 외할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딱 ‘이 놈이다!’ 싶었대요. 키도 그리 작지 않고 피부도 구릿빛이었대요. 그래서 어머니와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도시락 갖다 줘라, 빨랫감 받아와라 하며 온갖 심부름을 시켰대요. 과수원 집 막내아들도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았대요. 그런데 어머니가 퇴짜를 놨다지 뭐예요. 대머리 끼가 있다나 뭐라나. 외할머니는 기가 차서 어머니에게 차라리 나가 죽으라고 했대요.
어느 날 문간방에 홀어머니와 서른 된 아들이 새로 이사를 왔대요. 외할아버지와 평소 알고 지내던 국수 장순데 아들은 동네에서 인물 좋기로 소문난 백수건달이었죠. 외할머니는 그 아들이 마음에 안 들었대요. 홀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수 팔러 나가는데 허우대 멀쩡한 아들은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났거든요. 새벽에 도시락 2,3개씩 들고 학교 가는 하숙생들만 봤으니 얼마나 한심 했겠어요.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고생하는 홀어머니 생각해서 꾹 참았답니다.
그런데 그 모자가 이사 온 후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대요. 하루에 몇 개씩 달걀이 없어지고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같은 밑반찬이 팍팍 줄더래요. 외할머니는 부엌에 쥐가 있나 싶어, 쥐덫을 갖다 놨대요. 하지만 쥐는 안 잡히고 달걀과 밑반찬은 계속 없어지더래요. 그런데 어떤 일요일 날 새벽 부엌에서 어머니가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나오더래요. 삶은 달걀 ‘여스 알’이 든 빨간 손수건을 들고서요.
“너 그거 싸들고 어딜 가니?”
“예배당“
어머니의 한 마디에 외할머니는 기절초풍했대요. 외가댁은 매년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할 정도로 독실한 무속신앙 집안이거든요.
“뭐라구, 이 년아!”
외할머니는 등짝을 후려치며 집안 말아먹을 일 있냐고, 누가 예배당 가자고 꼬드겼냐고 다그쳤지만 어머니는 한 마디도 않더래요.
며칠 후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외할머니는 안마당에서 문간방 아들과 같이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대요. 문간방 아들은 웃통을 벗고 펌프질을 하고 있고 어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흥흥 웃으며 빨래를 하고 있더래요.
“이것들이 벌건 대낮에 뭐하는 짓들이야!”
외할머니는 다라이에 있던 물을 한 바가지 퍼 문간방 아들과 어머니에게 퍼부었대요. 그리고는 당장 방 빼라고 소리소리 질렀대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범인이 한 지붕 밑에 있을 줄이야.
그래서 문간방 아들이 방을 뺐냐고요? 빼긴 뺏어요. 어머니랑 같이요. 어머니가 문간방 아들과 결혼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답니다. 외할머니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대요. 과수원집 막내아들 퇴짜 놓고 결혼하겠다는 놈이 하필 백수건달이라니. 그래서 직업도 없는 놈하고 뭐 해 먹고 살 거냐고 했더니 어머니 왈,
“걱정 마.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이랬다지 뭐예요. 뭐가 그리도 자신만만한지 외할머니는 그저 기가 찰 따름이었대요.
그래서 어머니가 행복하게 잘 살았냐구요? 아니요. 어머니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내 발등 내가 찍었다고 후회를 했대요. 글쎄 이 말을 환갑 넘어서까지 하지 뭐예요. 스스로 찍은 발등이 엄청 쓰리고 아팠나 봐요.
외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절대 남자 얼굴 보지 마라! 남잔 무조건 생활력이야!”하며 신신당부를 했어요. 과수원집 막내아들은 은행에 취직해 지점장까지 됐다면서 어머니가 당신 말만 들었어도 사모님 소리 듣고 살았다고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내가 여태 결혼 못 한 건 어머니를 닮아서 남자 얼굴만 본 건 아닌가, 하고요. 그럼 너도 어머니처럼 곱게 생겼냐구요? 아니요. 안타깝게도 그건 절대 안 닮았네요.
*부분은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앞 문장을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