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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돌이 Jul 01. 2020

우리집엔 어른이가 산다

#7.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우리 집엔 어른이가 산다. 어른이는 열 살짜리 조카다. 언니 네가 맞벌이라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에 있다가 저녁때 자기 집으로 간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방학 아닌 방학을 보내느라 우리 집으로 매일 등교를 한다.     

우리 집에 하루 종일 있다 보니 내가 엄마랑 다투는 걸 거의 매일 보게 된다. 애 앞에서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엄마랑은 사소한 걸로 자주 부딪힌다. ‘왜 내 물건 맘대로 치워?’ 부터 해서 ‘왜 주방에서 살충제를  뿌려?’ 등등 자질구레한 일들로 자꾸 싸우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하던 처음부터 말투가 퉁명스럽게 나간다. 그럼 엄마도 기분이 나빠서 삐딱하게 대꾸한다. 그러다 결국 어른이에게 한소리 듣고 말았다.      

“이모는 할머니한테 왜 그렇게 말해?”

순간 당황했다. 그래도 뻔뻔하게 되물었다.

“내 말투가 어때서?”

“꼭 화나서 할머니 야단치는 거 같잖아.”

양심에 찔렸다. 그래도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야. 할머니가 잘 못 들으니까 큰 소리로 말하는 거야.”

어른이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 

‘그래!’

어른이가 가자미눈을 했다.

‘거짓말!’

‘진짜라니까!’

순간 민망해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 후로 어른이는 내가 엄마한테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톤! 톤!” 하고 소리친다. 그리고 엄마가 내 말을 잘 못 들은 것 같으면 아예 엄마한테 가서 눈을 보고 조곤조곤 내 말을 전한다.  

“할머니. 이모가 어쩌구 저쩌구래…….”

어른이가 그럴 때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다. 동생이 엄마랑 식탁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내 옆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던 어른이가 갑자기 나를 툭 치는 거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모도 둘째 이모처럼 할머니한테 저렇게 좀 해봐. 이모 하고 싶은 말만 따다다다다 하지 말고……그건 대화가 아니라 잔소리야.”

“우하하하하!”

너무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었다.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니 엄마는 없고 어른이 혼자 집에 있었다. 그래서 어른이에게 할머니 어디 가셨냐고 물었더니 남자 친구 만나러 갔다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할머니가 너한테 남자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고 나갔어?”

“아니. 할머니가 전화 통화하는데 할아버지 목소리가 다 들렸어. 어린이대공원에서 만나자고 하던데.”

“헐! 애 혼자 놔두고 뭐 하는 거야…….”

내가 궁시렁거리자 어른이가 한마디 했다. 

“내가 나 혼자 있어도 된다고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모 질투해? 할머니가 남자 친구 있어서 샘 나?”  

“질투는 무슨! 그냥 몰래 만나는 게 싫은 거야." 

“할머니가 비밀 연애하는 게 어때서? 그거야 할머니 자유지.” 

“헐! 그럼 넌 할머니가 결혼한다고 하면 찬성이야?”

“결혼? 그건 쫌 아니다…….”

“왜, 연애는 되고 결혼은 안 돼?”

“에이, 그 나이에 결혼을 어떻게 해? 나이가 너무 많잖아.”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럼 나도 결혼 못하니?”

“당연하지!” 

“뭐라고! 내 나이가 어때서?”

“결혼하기엔 나이가 많잖아.” 

“나보다 나이 많아도 결혼한 사람 많거든!” 

“에이, 설마……그 나이에 결혼 안 한 남자들이 없을 텐데.”

아, 이 배신감을 어쩌란 말인가! 유치원 다닐 때만 해도 자기와 놀아야 되니까 오십 넘어서 결혼하라더니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결혼해서 이 나이에도 결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만……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는 게 쉽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어른이가 나에게 롤 모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없다고 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도 롤 모델이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생각 없이 살았나 보다.  

“넌 롤 모델이 누군데?”

“난 아빠.”

아빠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야구를 좋아해서 좋아하는 야구선수 이름을 댈 줄 알았다. 

“왜 아빠야?”

“아빠는 뭐든지 잘해. 집에 고장 난 게 있으면 다 고치고 나랑 야구도 잘해줘.”

그래서 그런지 저녁에 아빠가 데리러 오면 “아부지, 아부지!” 하며 매미처럼 옆에 착 달라붙는다. 그러면 형부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다.      


엊그제 만해도 기저귀 차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녀석이 이젠 10대가 돼서 날 가르치고 있다. 참 배울 점이 많은 녀석이다. 

내가 늙으면 어른이는 나를 어떻게 대할까?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나를 배려해줄까, 아니면 말귀 못 알아듣는다고 나처럼 짜증을 낼까? 내 욕심이지만 나도 엄마처럼 대해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가치 늙어가는 중이다.

어른이는 자라고 나는 늙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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