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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돌이 Jun 07. 2020

엄마의 도시락

 #5.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도시락 반찬은 김치볶음이나 시장에서 사온 마늘종 장아찌나 무말랭이 같은 거였다. 일을 하느라 피곤했던 엄마는 밥과 국만 만들고 밑반찬은 시장에서 사왔다.      


같은 반이었던 H의 도시락 반찬은 늘 계란말이였다. H의 엄마는 리어카에 계란을 한가득 싣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계란을 팔았다. 한번 정도는 계란 장조림을 싸올 법도 한데 계란말이만 싸오는 걸 보면 깨져서 못 파는 걸로 도시락 반찬을 만드는 것 같았다.

       

K의 도시락은 늘 빵과 우유였다. K는 2교시가 끝나면 매점에 가서 빵과 우유를 사왔다. 왜 도시락을 안 싸 오냐는 친구의 물음에 K는 엄마가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믿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다들 K가 엄마가 없거나 계모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새벽시장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전기밥솥에다 미리 밥을 해놓고 반찬은 나처럼 시장에서 사다가 싸 올수도 있는 거였다. 

       

나는 내 도시락 반찬이 창피했다. 내가 봐도 성의가 없어 보였다. 처음엔 김치볶음이 맛있다던 친구들도 몇 번 먹다 질렸는지 어느 날부터는 잘 먹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한, 두 개씩 먹어 줄 뿐이었다. 그렇다보니 나도 그들의 반찬을 먹는 게 불편해져 내 반찬만 먹게 되었다. 친구들과 같이 먹는데도 나 혼자 먹는 거나 다름없었다.    

  

H는 늘 도시락을 혼자 먹었다. 그것도 누가 볼까봐 반찬을 먹을 때만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사실 H의 그런 행동이 더 시선을 끌었다. 내 도시락 반찬이 온통 빨간 색이었다면 H의 도시락 반찬은 늘 노란 색이었다.

     

반면 K는 빵과 우유인데도 도시락을 싸온 친구와 늘 같이 먹었다. 남들처럼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항상 밝은 얼굴로 빵과 우유를 달게 먹었다. 나는 K의 그런 당당함이 부러웠다. 

     

내가 부러워했던 도시락은 P의 3층짜리 도시락이었다. P는 아침 점심 저녁 총 세 개의 도시락을 싸왔다. 아침에 등교 하자마자 한 개를 먹고 점심시간에 한 개 나머지 한 개는 야간자율 학습 때 먹었다. 반찬도 세끼가 조금씩 달랐다. 옛날 소시지 부침. 미니 돈가스 튀김, 어묵볶음, 미역줄기볶음 등 색깔도 알록달록한 게 다 맛있어 보였다. P는 도시락을 먹는 게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먹는 것 같았다.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싫던 김치볶음이었지만 사실 난 엄마의 김치볶음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지금도 입맛이 없거나 반찬이 없을 때 엄마에게 김치볶음을 해달라고 한다. 설탕과 기름만 넣고 만드는 데도 엄마의 김치볶음은 언제 먹어도 늘 맛나다.      


며칠 전 저녁에 꽃게를 사다 꽃게탕을 끓였다. 꽃게가 제철이라고 해 나름 생각해서 끓인 건데 엄마는 꽃게는 먹지 않고 국물만 떠먹었다. 처음엔 엄마가 자식들 먹으라고 안 먹나 싶었다. 하지만 어금니 세 개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어금니가 세 개씩이나 없으니 딱딱한 꽃게가 그림의 떡이었던 거다. 그러고 보니 이가 빠진 후론 삼시세끼를 국에 밥을 말아 마시듯이 먹었다.

      

돌이켜 보면 김치볶음은 일을 하느라 늘 피곤했던 엄마가 나를 위해 싸 줄 수 있었던 최고의 도시락반찬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할머니가 된 엄마를 위해 건강한 도시락을 쌀 차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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