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설날이 다가오면 할머니는 동태를 한 궤짝이나 사셨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동태순대와 동태식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궤짝에 들어있는 수십 마리의 동태는 꽁꽁 얼어 한 덩어리로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그것들을 떼어내려고 마당에 궤짝을 여러 번 패대기쳤다. 궤짝을 들어 올릴 때만큼은 할머니의 기역자 허리가 일자로 꼿꼿해졌다.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동태들이 여기저기로 튕겨져 나갔다. 그것들을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의 모습은 기역자 허리 탓에 꼭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마리 주워 다라이에 담고, 또 한 마리 주워 다라이에 담고…...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담요를 쓰고 마루에 앉아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서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맨 손으로 동태를 손질했다. 식해로 만들 동태는 대가리를 자르고 내장을 손질한 후 토막을 냈고 순대로 만들 동태는 대가리는 그대로 두고 내장, 지느러미와 아가미만 떼어낸 후 얼음장 같은 수돗물에 씻고 또 씻었다. 동태를 손질하느라 빨갛게 언 손이 더 시뻘게졌다. 보고만 있는데도 내 손이 다 시렸다.
“할머니 손 안 시려? 그러다 할머니 손도 동태 되겠다. 따뜻한 물로 해.”
“아이고야. 누가 생선을 따뜻한 물에 씻나?”
할머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왜? 그럼 안 돼?”
“그럼! 찬물에 씻어야 비린내가 안 나지.”
“그래? 그럼 고무장갑이라도 끼고 해.”
“나는 답답해서 고무장갑 못 낀다. 추우니까 문 닫고 방에 가 있어. 감기 걸릴라…….”
마당에 계신 할머니가 오히려 마루에 있는 내 걱정을 했다.
할머니는 깨끗이 씻은 동태에 소금을 뿌린 후 식해로 만들 것들은 채반에 담아서, 순대로 만들 것들은 꼬치에 꿰어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이틀 정도 지나 동태가 꾸덕꾸덕해지면 그제야 비로소 동태순대와 동태식해를 만들 수 있다. 동태순대는 우거지, 양파, 돼지고기 간 것, 고춧가루, 마늘 등으로 만든 양념소를 동태 뱃속에 넣고 바늘로 아가미를 꿰맨 후 다시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말린 후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담백하고 고소한 게 맛이 기가 막히다.
동태식해는 먼저 좁쌀 밥을 지어 엿기름을 체에 걸러 붓고 따뜻한 방에서 삭힌다. 좁쌀이 삭으면 고춧가루, 다진 마늘, 생강, 액젓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동태와 버무린 후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아 따뜻한 방에 두고 익힌다. 삼일 정도 지나면 물이 생기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새콤한 냄새가 나는데 그럼 완전히 익은 것이다. 잘 익은 식해를 흰쌀밥에 얹어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할머니네 가족은 6.25 전쟁이 나자 고향인 함경북도 북청에서 남으로 피난을 왔다. 할아버지는 피난길에 북한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3남 4녀 중 네 딸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었다. 서울에 도착한 할머니는 왕십리에 정착을 했고 생계를 위해 국수장사를 시작했다. 그때 당시 열 살이었던 아버지는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하루 종일 할머니를 도왔다고 한다.
“네 큰아버지랑 작은아버지는 아침에 밥 먹고 나가면 해 질 녘에야 집에 들어왔는데 네 애비는 내 심부름하느라 놀지도 못 했어. 물 길러 오고 장작 주워오고……. 그러다 동네 심부름을 도맡아 했지. 이 집 서 이것 좀 해다오, 저 집서 저것 좀 해다오 하면서 네 애비를 찾았어. 그래서 얻은 별명이 대신돌이야. 심부름을 대신해준다고 사람들이 네 애비를 그렇게 불렀지. 심부름을 해주면 심부름 값으로 보리개떡이나 주먹밥을 받아왔는데 네 큰아버지랑 작은아버지한테 다 뺏겨서 네 애비는 한 입도 못 먹었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사람들이 먹을 걸 주면 집에 가져오지 말고 밖에서 다 먹고 들어오라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 먹으라고 가져온다는 거야. 심부름하느라 지 놈도 배가 고팠을 텐데……. 네 애비는 고등학교도 못 나왔어. 집에 돈 없는 거 알고 자기가 먼저 그만둔다고 하더라. 어찌나 미안하던지……. 네 애비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동태순대랑 동태식해 밖에 없었어. 네 애비가 제일 좋아한 음식이거든.”
할머니는 못 배워서 그런가, 삼 형제 중에서 제일 못 산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더 이상 동태순대와 동태식해를 먹을 수 없었다. 엄마가 만들어주길 내심 바랐지만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 당시 그는 실직상태였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았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세도, 형광등이 깜빡거려도 고칠 생각을 안 했다. 엄마가 그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졌고 고장 난 형광등도 갈아 끼웠다. 어린 시절 대신돌이로 살았던 삶에 지쳤던 걸까?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게으름뱅이가 되어 하루하루를 담배와 술로 보냈다. 정말이지 무책임하고 무능한 가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직접 동태식해를 만들겠다며 재료들을 사 가지고 왔다. 엄마가 비린내 난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만 했다. 혼자서 동태를 소금에 절이고 좁쌀 밥을 만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먹고 싶으면 저럴까 안쓰럽기도 했다. 완성된 식해를 항아리에 담아 방에 두고는 수시로 뚜껑을 열어보며 식해가 익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끝내 먹지 못했다.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는 5개월 넘게 병원에 입원을 했고 그 날부터 죽을 때까지 입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대신 위와 연결된 콧줄로 두유 같은 환자식만 먹어야 했다. 그 사이 그가 만든 동태식해는 상해버렸다. 엄마는 그걸 버리면서 먹지도 못할 거 왜 만들었냐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의 첫 기일을 앞두고 엄마가 동태식해를 만들었다. 만들어 놓고 먹지도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실컷 먹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생선은 비려서 먹지도 않는 엄마가 식해를 만드는 모습을 보니 그 추운 겨울 아버지를 위해 동태식해를 만들던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제삿날 엄마가 동태식해를 한 대접 가득 담아 제상에 올렸다. 그리고는 아버지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게 해 줘서 미안해요…….”
엄마의 말끝에 울음이 묻어났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혼자서 동태식해를 만들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그가 먹고 싶어 했던 동태식해, 그에게 동태식해는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히 좋아하는 음식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외로웠던 그에게 위로가 된 음식이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가 가장 원했던 건 가족의 관심과 배려가 아니었나 싶다.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누구보다 괴로웠을 그에게 자식으로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