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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수니 Feb 04. 2021

퇴직서에 사인하고 맞이한 생일

백수가 되어서 맞이하는 생일은 성스럽네

회사를 약 10년 하고 5개월 다녔다. 나의 첫 입사이면서 첫 퇴사이자 첫 퇴직이다. 직장인 라이프 올인원 수준이다. 첫 퇴사를 퇴직과 같이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퇴직은 퇴사보다는 확실히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볍게 생각해보면 둘 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뿐이다. 내가 퇴직서를 제출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사인을 하냐 마냐가 아니었다. 언제 제출해야 하는가였다. 공교롭게 퇴직서 제출기한이 이번 달까지면서 내 생일까지기도 했다. 제출기한까지 3일 남았다. 퇴직서를 굳이 일찍 내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생일날 내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반반무마니의 결정장애가 왔다.


퇴직서를 일찍 내고 싶지 않은 마음 반.

희망퇴직 이야기는 나온 지가 꽤 되었고 예측했던 일이었다. 그럴 때마자 나는 1등으로 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쿨내 나게. 현실은 제출기한이 며칠 안 남도록 아직도 회사를 떠나질 못하고 있다. 이유는 쿨하지 못한 회사의 위로금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입사자들은 계속 뽑으면서 돈은 없다고만 한다. 나에게 주기로 했던 것은 나중으로 미루더니 이제는 못 주겠단다.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회사로부터 어떻게든 내가 받기로 했던 보상은 받고 싶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벌써 제출기한이 끝나가고 있었다. 삐뚤어진 마음에는 관성이 있지 않던가. 이렇게 된 거 마지막 날 내고 싶어 졌다.


생일날 내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내가 가장 바라는 생일은 무탈하고 평범한 하루다. 소소하고 따뜻한 생일이 좋다. 우울한 생일을 보내 본 후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우울한 생일의 진짜 끔찍함은 기억에 그림자로 남는다. 새로운 생일마다 자기도 같은 '생일'이라는 이유로 꼬박꼬박 떠오른다. 물론 시간이 해결은 해 준다. 상상을 해 보았다. 생일날 퇴직서를 낸다면 어떨까? 어째꺼나 당분간은 미역국 먹으면서 케이크 자르면서 한 번이라도 더 회사가 떠오를 것 같다. 퇴직이 떠오르는 건 괜찮다. 퇴직이란 게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니깐. 선택일 뿐. 다만 연관검색어처럼 회사도 같이 떠오르는 건 싫다. 앞서 말한 우울한 생일도 사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기에. 기억에 남는 생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퇴직하는 것에도 이렇게 에너지를 쏟아야 되나? 란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고민하는 게 귀찮아졌다. 생일날만 안내면 되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생일 전날이 몇 시간 안 남았다.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휘리릭 적을 거 적고 사인하고 파일 첨부까지 1분. 퇴직서를 메일로 제출했다! 입사하려면 그 많은 입사지원서를 채워 넣어야 되는데 퇴사는 사인만 하면 되니 간단해서 좋았다. 지난 10년간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이로써 끝났다. 이제 백수다! 그다음의 나는 어떤 나일까. 이번 생일은 백수가 되어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이자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생일이다. 가능성이 새하얀 백지인 나를 보니 성스럽게까지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꺾고 들어가는 36번째 생일이기도 하네. 나이는 꺾여도 내 가능성만큼은 쭉쭉 뻗어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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