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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을 Dec 29. 2020

SNS 경고장, <소셜 딜레마>

<소셜 딜레마>에 나타난 <오늘부터 로그아웃>과 <너브>

오빠가 종이 한 장을 가져왔어. 읽어 보니 이건 메타 무비 metamovie 글이네. 영화로 영화를 소개하는 글 말이야. 일단, <소셜 딜레마>가 눈에 띈다.


                       <경고장>


이 종이를 읽는 지금, 그대는 생각해보라. 오늘 SNS를 몇 시간 했는가. 1시간 정도만 했다고 생각하는가?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은? 유튜브는? 핸드폰 사용시간을 측정하는 앱을 설치해 보라. 아! 우리 인간은 대체 SNS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생각 없이 사용하던 핸드폰이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1. <심심하니까 핸드폰을 한다는 그대에게>


넷플릭스 원작 영화 <오늘부터 로그아웃>을 보라. 주인공 '아나'는 핸드폰에 빠져 있다. 핸드폰에 과하게 중독이 돼서 운전을 할 때도 핸드폰을 놓지 못한다.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으니. 아나는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게 된다. 핸드폰이 없는 삶. 그것도 곤욕인데 전자기기가 아예 없다니. 아나는 수시로 핸드폰의 유혹에 시달린다. 지나가는 아이에게 핸드폰을 빌리려다(훔치다) 걸려서 난리가 나고.


영화 <오늘부터 로그아웃>은 핸드폰에 빠져 사는 젊은 이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필터링되지 않은 일상은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일상과 너무나 흡사한 탓인지, 실감이 난다. 운전 중에 핸드폰을 하다가 사고가 난 사례가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이미지 출처: 다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오늘부터 로그아웃)


궁금하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핸드폰에 언제부터 중독됐는지 아는가? 인스타그램에 댓글이 얼마나 달렸는지 언제부터 궁금했는가? 마음 편히 독서에 집중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는가? 밥 먹을 때 밥만 먹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새벽에 숙면을 취했던 때는 언제인가. 핸드폰을 안 보고 푹 잤던 때 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소셜 딜레마>를 보라. 핀터레스트에서 회장직을 임했던 분도 핸드폰에 중독이 돼있었다. 그는 말했다. 공사를 구분해야 하건만 집에서도 SNS를 하고 있었다고. 그 자신도 이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을 자동차에 두고 내리겠다고 다짐한 게 수차례였지만 매번 못 지키고 말았다는 그. 그는 우리 현대인이 SNS의 위험성을 알아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SNS의 해로움을 아는 사람조차도 여기서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말한다. "심심하니까 핸드폰을 잡는 거예요." 그러나 <소셜 딜레마>에 나온 한 직원의 말을 들으면 단순히 '심심하다'는 이유로 핸드폰을 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직원은 "그건 우연이 아니라 그렇게 디자인된 거예요"라고 했다. 계속 행동을 붙잡아두도록 심리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이다. 그것을 설정한 이는 윤리학자가 아니니,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SNS를 대해야 한다고.


경각심을 가져라. <소셜 딜레마>에 나온 말들을 보고 깨달아라. "행동과 인식의 변화가 상품인 것입니다"라고 했으니.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바꾸는 거예요"라고 했고, "인간이 선물로 거래되는 시장인 것이에요"라고 했으니.


아, 결정타가 남았다. 녹다운되지 않기를.


"당신의 모든 행동이 세심히 관찰되고 기록됩니다. 무슨 이미지를 얼마나 오래 봤는지도. 사람이 외로워하거나 우울해하는 것도 알아요. 사용자가 전 애인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핸드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핸드폰에 '잡혀' 있었다.


2. <핸드폰을 자연스레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12월 26일 기준으로 넷플릭스에 올려져 있는 영화 <너브>를 보라. <너브>를 보면 많은 청년들이 '좋아요'로 남들의 관심을 받는다. 문제는, 이 '좋아요'가 경쟁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좋아요'를 더 받기 위해 과감한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며, 본인의 '좋아요' 수를 늘린다. 눈을 감고 오토바이를 타기도 하고. 위험한 사다리에 매달려 큰일이 날 뻔한다. SNS로 본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이들은, 그래서 날이 갈수록 위험한 소재를 찾는다. 그것이 '상품화'가 되니까. 그렇게 한 인간의 목숨이 '좋아요 숫자'에 귀속된다. 여기에 북마크를 찍어라. 이따가 이 부분을 또 읽어야 되니까.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너브)


일단 <소셜 딜레마>를 보라. 이 다큐멘터리에 첨부된 영화를 주의 깊게 보라. 영화 속에는 한 가정이 나온다. 부모와 세 명의 자녀. 여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볼 수 '있었'는가?  예컨대 '식사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부모와 첫째 딸은 SNS가 해롭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잠금장치'에 핸드폰을 1시간 동안 넣어두자는 말에 군말 없이 응했다. 그 잠금장치는 정해진 시간이 돼야만 열 수 있으니, 그동안만이라도 핸드폰을 안 하고 식사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딸은 어땠는가. 둘째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렇다면 셋째는? 셋째는? 이는 <소셜 딜레마>를 보고 직접 확인하라. 나는 차마 여기에 셋째의 행동을 담을 수 없었으니. 


<소셜 딜레마>는 아주 정교하게 짜인 다큐멘터리다. 나이가 많은 부모와 첫째 딸은 SNS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에서 멀어졌다. 어쩌면 멀어지기 쉬웠던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비교적으로 나이가 어린 둘째 아들과 셋째 딸은 어땠는가. 그 유혹을 못 이기고 SNS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셋째에 주목하게 됐다. 그 친구가 우는 장면을 보았는가. 핸드폰에 사진을 올렸다가 비교당하는 모습. 그렇게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을 통해 본인의 '가치'를 확'정'받는다. '정체성'과 자존감이 타인의 평가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장면은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SNS 사용량이 높아질수록 미국에서 10대가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려 괴로워하는 비율도 올라갔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북마크'를 찍어놓았다. <너브>가 그저 오락영화인가? 아니면 파란만장한 꿈을 지니고 있는 젊은이들의 애한을 담아놓은 비수의 영화인가.


<판도라의 상자엔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으니>


물론, 무조건 SNS를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주위에 보면 다 하지 않는가. <소셜 딜레마>에서는 핀터레스트 회장과 구글 직원, 페이스북 직원 등은 모두 자신의 자녀에게 핸드폰을 안 시킨다고 했지만, 모두가 다 이렇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SNS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만은 알아야 된다. 그렇게라도 우리의 마음을 보호해야 된다. 우리는 무엇이 사실인지 볼 수 있어야 된다! 


<소셜 딜레마>는 그래도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말미에는 지금 그대가 실천할 수 있는 SNS 방어법을 소개하고 있다. 오직 그대의 실천만이 남을 뿐.




 영화를 왜 볼까? 이유야 많겠지만, <소셜 딜레마>를 통해 한 가지 이유를 기억하면 좋겠다. '눈'을 뜨기 위해. 위험을 보고 피할 수 있는 눈이 제대로 떠 있기 위해. 그래서 영화를 보는 거라고. 이 영화는 청자에게, 이 사회의 시민들에게 '경고'하고 있으니, 오빠가 이렇게 봐야 된다고 추천하는 거야.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의 회사에서 일했던 분들은 말해. 처음 SNS를 만들어 활성화시킬 때는 그게  '선'인 줄 알았다고. 세상에 이로운 일인 줄 알았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서 알았대. "우린 그 동전의 앞면에 너무 혹했던 거예요" 그리 깨달으셨대. 핸드폰을 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은 행복하게 해 줄지 모르지만, 그게 이후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몰라.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게 아냐. 위험성을 알고 대비하자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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