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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을 Aug 17. 2021

<더 차일드>

책임감에 대하여

<더 차일드> 


이 영화.

보고 나서 생각이 많아지더라. 


일단 이 영화는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보면 좋겠다. 흠. 갑자기 퀴즈! ‘책임감’이 무슨 뜻일까? 혹시 들어봤어? ‘왜 책임을 안 지려고 해요?’, ‘책임감이 정말 없군요!’ 그런 말 많이 하던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전을 찾아보니 책임감이란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해. 직장에서 일을 한다면 지각 안 하고 정해진 시간 근무하고 농땡이 안 치고. 

    

근데 요즘은 무엇이든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잖아. 잠깐 생각해보니 근래에 본 뉴스 기사가 떠오른다. 대기업 CEO였나 임원이었나. 그분들이 본인의 일은 나몰라하고 도망갔다고 하던데. 그분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들에게 많은 ‘책임’을 맡겼는데. 안타깝게도 그분들은 그 자리에 걸맞은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난리가 났지. 여기저기에서 ‘부도날 지경이다.’ ‘밥줄 끊기겠다, 이직해야 되나.’ 불평이 쏟아졌어. 근데 그런 사람들뿐일까? 어디를 가든 책임감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니. 

   

<더 차일드>는 책임감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했지? 책임감은 어디에든 필요해서, 학교에서의 책임감, 직장에서의 책임감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이 영화에서는 중에서도 ‘사랑’할 때 필요한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전하고 있어. 영화를 통해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생기면 좋겠다.




아이를 팔아넘긴 브루노 


영화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시작돼.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아주 기쁜 일이야. 누가 봐도 축복할 일이고. 근데 주인공이자 아이의 아빠인 브루노는 그렇지 않아. 아이에게 관심이 없지. 아이 이름도 제대로 안 지어 주고. 이름을 지어달라는 아내의 말에 시큰둥하게 답해. 이러한 부분부터 이 영화의 비극을 밝히고 있었어. 


브루노는 있지. 심지어 아이를 팔아.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낳은 아이를. 돈을 받고. 아내 소냐가 이를 알았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그래서 브루노에게 물어봤지. 아이를 왜 팔았냐고. 울면서. 대체 왜. 왜. 왜!      

근데 브루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  

‘또 낳으면 되지.’ 


이건 누가 들어도 어이없는 말이잖아. 또 낳으라니. 온갖 고생 하면서 낳은 아이. 몇 달이나 배 속에서 함께 한 아이. 누구의 아들도 아닌 자신의 아들인데. 아이가 없으면 또 낳으면 된다니? 브루노 얼굴에다가 먹칠을 해야겠다. 


그런데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브루노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많다는 거. 그가 전혀 뜬금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그게 훨씬 더 무서운 일이야. 전에 어떤 커뮤니티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봤어. 아이를 중절했는데,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아이야 또 낳으면 된다고. 아이야 언제든 또 만들면 된다고. 이런 사람이 정말 있다니. 


그런 사람들은 책임지기 싫다고 하더라. 아이를 보는 게 귀찮다고. 본인이 하는 게임을 방해한다고. 아이를 아무렇게나 방치해. 8월 10일 즈음. 즉, 최근에는 10대 막 난 아이를 변기에다 버렸다는 기사도 나왔어. 너무 끔찍하잖아. 책임감이 부재하면 악이 사방에서 판을 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더 차일드>는 시종일관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였어.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랑’을 하기 위해선 ‘사랑함’에 걸맞은 책임감도 필요하다는 거. 무작정 ‘사랑한다’는 말이 다가 아니라는 거.


근데 말이지. 왜 책임지지 못할 일들을 떠안으려고 할까? 책임질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도 책임지기 힘들 텐데. 무작정 떠안으면 책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니 브루노와 소냐가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이를 키울 여건이 전혀 준비돼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랑에 맹목적으로 도취돼 있다니. 브루노의 행동에서 내일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어. 그는 그냥 오늘만 즐기고 있었어. 도둑질하면서 살아가고. 외제차를 빌리느라 모든 돈을 쏟아붓고. 

 

그래서 어떻게 가정을 일구겠어.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멀리 내다보지 않으면 힘든 일인데. 행동 하나하나엔 책임감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더라.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소냐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브루노가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지금 무엇이 부족한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랬다면 정말 좋을 텐데.

   





# 인생을 베이비박스에서 시작하는 아이들 

   

뉴스 기사에서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을 찾을 때가 있어. 막 태어나서. 사랑도 못 받고. 차디찬 거리에 내던져져서는, 부모의 이름조차 모르고 첫 돌을 맞는 아이들을. 대체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저질렀는지. 태어나면서 부모를 얼마나 힘들게 했다고. 베이비박스에서 인생을 시작한 걸까? 그 아이들은 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날 때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자랄 권리를 잃어버린 걸까? 


책임감이 없으면 본인만 고생하는 게 아니야. 함께 있는 사람도 덩달아 힘들어지는 거였지. 


오빠라고 항상 책임감이 있진 않아. 부끄럽지만, 오빠도 책임감 없이 행동할 때가 종종 있어. 기억하기로 어떤 모임에서 중책을 맡을 때였어. 그때 오빠는 오빠가 맡은 일이 너무 불편했어. 그 일이 오빠에게 큰 부담이 됐고. 오빠가 원해서 맡은 일도 아닌데. 모두가 오빠에게 도움을 청했지. 처음에는 열심히 했지만 어느 순간 회의감을 느끼고, 대충대충 하기 시작했어. 그러다 보니 모임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어. 제대로 열리지도 않고. 모여도 제대로 진행이 안 됐어. 


그러다 보니 오빠가 알게 모르게 모임원들이 고생을 했다고 하더라. 오빠가 해야 할 일을 다른 모임원들이 나눠서 했대. 오빤 그때 느꼈어. 내가 책임감이 없으면 나 혼자 손해 보는 게 아니라는 거. 너무 당연한 일인데. 몸과 마음으로 느끼니 조금 다르더라.

   

<더 차일드> 속에서도 찾을 수 있어. 이 영화에선 아이도 상처를 받지만, 브루노의 아내 소냐도 상처를 받아. 울다가 쓰러질 만큼.


‘책임감’이란 ‘공동체’라는 개념의 일부분이더라. 내가 책임을 못 지면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고생하니까. 내가 허투루 놀려댄 말 몇 마디로 한 모임, 한 공동체가 손가락질당하기도 하고. 

    

가끔은, 내 행동 때문에 아파할 상대방을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 물론 오빠도 그렇고. 오빠라고 항상 모든 행동에 있어 완벽하게 올곧진 않으니까. 가끔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잘못하기도 하고. 이 영화는 그런 반성을 남기는 영화다. 그치? 




몸이 자란다고 해서 모두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야. 몸은 건장한 어른이 됐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인 경우가 많아. 그게 문제지. 마음은 여전히 아이인데 어른의 역할을 맡으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나이는 단순히 숫자놀음이 아닌데. 

 

오빠는 네가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맡은 일은 충실히 하는. 식언을 하지 않는. 맡을 수 없는 일을 맡지 않는. 무모하게 용기 내지 않는. 

   

물론 지금도 충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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