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를 켜고 세수할 준비를 하는데 따뜻한 물이 도통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엄청 차갑지도, 엄청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또 미지근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온도의 물. 나는 내내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그 온도의 물로 세수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물이 나온 건 다름 아닌 세수를 마치고, 거품이 묻은 팔목을 닦으려 수도꼭지에 바짝 몸을 갖다 댄 때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따뜻한 물은 마치 나를 약 올리듯이 그제야 일정한 속도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내 입가엔 어중간한 물의 온도와 같은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것보다 중요한 건 따뜻한 물이 '언제' 나오냐는 것. 나는 지금 당장의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데 뒤늦게 팔팔 끓는 뜨거움을 갖다 대면 그게 과연 무슨 소용일까.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필요한 건 역시나 이처럼 적절한 타이밍이 아닐까.
힘든 순간엔 적절한 위로를. 행복한 순간엔 적절한 축하를. 흔들리는 순간엔 적절한 격려를. 함께하는 순간엔 적절한 웃음을.
내가 필요한 순간에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이 소중한 건 과연 이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따뜻함이 필요한 때에 기꺼이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식어버린 것에도 또 한 번 눈길을 쏟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기를. 나는 오늘도 또 한 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