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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은 May 02. 2022

확신

 확신이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굳게 믿음. 또는 그런 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나는 확신이란 ‘배신을 당하지 않을 거라 믿는 마음’이라 정의하고 싶다.


 ​보편적으로 확신이란 단어는 부정적 의미보다 비교적 긍정적 의미로서 많이 쓰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자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몇 없다. 100%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게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내가 제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나 자신조차도 가끔은 이해할 수 없고,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순간순간에 직면하곤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100%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그저 순간순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내일 오후 두 시에 5번 출구 앞에서 보자, 해서 다음 날 두시 언저 리즘 5번 출구 앞에 서있는 너의 뒤통수를 본 순간 같은 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사람은 확신이란 단어를 애정 하는 편이다. 나는 확신 있는 사람이 좋고, 확신 있는 관계가 좋고, 확신 있는 약속이 좋고, 확신 있는 언어가 좋고, 확신 있는 사랑이 좋다. 앞서 말한 것들을 한 마디로 응축하자면 나는 확실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확실한 걸 좋아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게 확실한 그런 거 말이다.

 그건 어쩌면 지금껏 내가 겪은 여러 경험들에 의해 형성되어 온 하나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확신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확신 없는 관계를 지속했을 때, 확신 없는 약속을 맺었을 때, 확신 없는 언어를 사용했을 때, 확신 없는 사랑에 빠졌을 때. 그때 받은 상처가 너무나 선명해서, 그게 너무나 괴로워서 이토록 확신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너무나 당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사람의 몸은 뜨거운 걸 만졌을 때 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무조건 반사라고 일컫는 것 말이다.

 언제 한 번은 바람을 폈던 전 애인을 용서하고 다시 만났을 때 7시간 정도 연락이 안 되던 날이 있었다.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나는 단순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걱정만 무지 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그가 또 한 번 나를 배신했다 생각하고, 7시간 동안 이미 마음 정리를 다 해두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일종의 정신적 무조건 반사였을 거다.

 그 이후로도 나는 이따금씩 그에게 답장이 늦게 오거나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며, 그와의 이별을 서랍 속 상비약처럼 항시 미리 준비해두었다. 참 슬프면서 쓸쓸하기 그지없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 비참한 짓을 안 하게 된 건 그가 절대 다시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란 확신을 어느 정도 하게 된 이후다.

 허나 그 이후로도 과거의 그 기억이 나를 무척이나 관통했는지 다른 이성들을 만날 때 유독 연락이 느린 상대를 만나면 나는 이미 최악의 수까지 미리 다 계산하고, 다치지 않을 만큼의 마음을 빼놓게 되어버렸다. 혹독한 겨울을 버티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겨울잠을 자는 여느 야생동물들처럼 나 또한 앞으로 받을 상처에 혹여나 싶어 마음에 구덩이를 파게 되어버린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재 나는 내가 믿는 사람들이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짜리 집을 가지고 있으면   개를 전부 내어주던  예전의 나였다면 지금의 나는   개짜리 집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는 내가 가지고,   정도만 내어주는 사람이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뀐 게 있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방의 개수가 줄어든 만큼 배신이나 거절에 좀 더 너그러워졌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을 수는 없고, 무엇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말이다. ‘사람이니까’ 실수하고, 잘못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 얽힌 무수히 많은 기억들을 나의 소중한 자산 삼아 살아가고 싶다.


 

 인생은 희로애락의 적절한 박자에 맞춰 리듬을   있을  더욱 아름답다는 .  사실을 20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지금에서야 나는 어렴풋이  것만 같다.

 20대의 나는 타인에게 얼마만큼의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을까. 그걸 내가 감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조금 남은 20대에도, 다가올 30대에도 나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고만 싶다. 그게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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