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살 제법 발음하기 힘든 학원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여자라곤 서로가 전부였던 동네의 작은 학원에서 우리가 친해지는 것은 어쩌면 정말 당연한 수순이었을 수도. 아니면 거창한 의미를 두어 처음부터 우리가 만날 인연이었을 수도. 거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더 이상 그 학원을 다니지 않게 되어 너를 그냥 학원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로 두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모든 게 낯선 예비소집일날, 별안간 나를 보곤 해맑게 웃으며 세차게 손을 흔드는 너를 다시 보게 된 건.
집이 좀 산다는 짐작 하에 네가 사주는 떡볶이 그 외 주전부리를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다. 그럼에도 우린 방학이 되면 그 시절 최대의 사치인 대박집에서 고기를 사 먹고, 그 시절 최대의 유희거리인 럭셔리 노래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어린 날의 인사동 나들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전우치> 두 편의 영화, 너의 첫 자취방이었던 흑석동 고시원까지.
십 년도 더 지난 옛 기억 속에 있던 일이지만 이토록 생생한 걸 보면 그때 너랑 함께한 시간들이 참 꿈같이 행복하긴 했나 봐.
본인이 일하는 가게에서 만든 크림파스타가 그렇게 맛있다며 마감 직전 내 몫의 한 그릇을 남겨놓은 너를
좋아하던 선배에게 차여 술에 떡이 된 날, 택시 뒷좌석에 정신도 못 차리고 쓰러지는 내가 걱정되어 같이 홍대에서 안산까지 온 너를
속상한 일에 펑펑 눈이 내린 날임에도 우리 집까지 찾아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 펑펑 울던 너를
나는 사랑했나 보다.
우리가 마신 수많은 술병만큼 너를 좋아했나 보다.
어린 날부터 함께했던 탓에 삐죽빼죽 다듬어지지 못 한 자아를 맞대며 상처도 주고, 멀어지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서로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한 걸 보면 우리 인연이 그만큼 질겼었나 보다.
사귐과 동시에 세상에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가 생기는 격인 보통의 연애는 이별이라는 확실한 끝이 정해져 있기라도 하지만
우정이란 이름의 너와 나에겐 서로가 바라보는 가치관,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소원해져 버린 이유로, 그리고 굳이 입밖에 내지 않은 자질구레한 이유로 끝을 말하지 않고 끝을 냈어야 했나.
나이가 들수록 비단 연애 상대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진득이 마음을 주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환승역과 같다는 마음으로. 마음이 맞으면 머물다 가고, 맞지 않으면 떠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면 나도 굳이 기대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되니까. 기대 끝에 오는 커다란 공백을 삼켜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에도 어떠한 이해관계도 고려하지 않고 시간만 되면 줄곧 만나던 지난날이, 지난날의 너와 내가 그리운 걸 보면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여실히 이해받고 싶은가 봐. 그리고 덩달아 누군가를 여실히 이해하고 싶은가 봐.
입밖에 내어도 공기처럼 사라지는 마음을 꼭꼭 숨긴 채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