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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다

끝나지 않는 물음

by 최다은

평소 대화할 때 “왜?”라는 물음을 자주 입 밖에 내는 편이다. 개중의 누군가는 왜라는 물음의 연속이 다소 공격적이고 날카롭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왜?라는 물음에 꼬리를 무는 이유는 그야말로 내 앞에 있는 상대를 ‘열렬히’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잘 없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측면엔 무디고 서툴러 본의 아니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꼬집은 경험이 여럿 있다. 지금은 그나마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화된 T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여전히 누군가의 감정이나 마음을 살피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지곤 한다.

최근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오히려 공감력이 약하다.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에는 무뎌진다.” 이와 같은 글을 봤다. 정확히 검증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얘기인 것 같아 퍽 공감이 됐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는 이꼴(=) 그 누군가와 잘 지내고 싶은 욕구인 것을 사람들은 알까? 누군가와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상관이 없으면 그 누군가를 이해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이해 못 할 말과 행동을 하든 말든 철저히 무시하거나 외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나와 닿아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연신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바쁘다. 같은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나와 타인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사람을 이해하고, 또 그 사람이 겪은 일이나 느낀 감정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내가 누군가를 여실히 이해하기 위해 왜?라는 물음을 거듭 던지게 만드는 관계는 이해는커녕 말 그대로 관계에 왜?라는 의문만 남길뿐이다. 그리고 의문의 연속에 놓인 관계는 결국 믿음이나 노력, 애정, 희망과 같은 것들을 소실시키는 미궁에 빠지게 할 뿐이다. 그때는 나 자신조차 거듭된 왜?라는 물음들에 지쳐 입을 벙긋거리는 일밖엔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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