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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다

서울이라는 꿈

by 최다은

1. 서울에 살게 된 지도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커튼 하나 없는 동향의 방에서 눈부신 햇살에 괴로워하며 아침을 맞던 게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그 사이 나는 새로운 직장에 다니게 되었고, 비록 같은 동네 안이지만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 그것은 20대 내내 나의 소망이자 열망이었다. 어릴 적부터 혼자 사는 것을 늘 꿈꿔왔지만, 그 배경은 늘 서울이었다. 서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차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편도로 고작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서울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움과 설렘을 안겨주는 도시였다. 지금은 해외로 나가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그때는 서울에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2. 눈을 감으면 처음 서울역에 갔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 느꼈던 인상과 충격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열다섯의 소녀에겐 서울역은 서울의 중심이 되는 장소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들과 도시의 때를 잔뜩 뒤집어쓴 비둘기들, 그리고 허름한 롯데리아뿐. 그렇게 똥파리가 돌아다니는 롯데리아에서 친구와 함께 새우버거를 먹었다. 맛있었다. 그 당시엔 서울에서 롯데리아 버거를 먹는 것만으로도 소풍이나 여행 따위의 느낌을 손쉽게 낼 수 있었다.


모델 준비를 할 땐 또 얼마나 강남 일대를 뺀질나게 돌아다녔는가. 압구정, 신사, 교대, 강남역까지. 인생에서 몸이 제일 가벼운 시기였다. 꺼지지 않는 허기를 품은 채 참 많은 옷을 입고 벗곤 했다. 자라, 에이치엔앰, 에이랜드, 아메리칸 어패럴, 그 외 여러 브랜드숍까지. 압구정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늘 지나치던 던킨 도넛에서 풍기던 고소한 도넛 냄새와 학원 근처의 버거킹에서 흘러나오던 기름진 패티 냄새. 그 냄새들을 맡으며 어지러이 꿈을 좇곤 했다.


3. 2023년 6월 7일,


20대의 끝자락에서 드디어 서울시민이라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바라던 꿈을 이룬 셈이었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는 ‘해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나의 독립을 축하해 주었지만, 정작 나는 기쁨, 설렘, 두근거림, 행복에 흠뻑 젖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막상 ‘실제로’ 서울에 살게 되니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덤덤한 기분이 압도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왕복 3시간을 들였을 거리도 이제는 30분이면 충분했고, 이른바 ‘서울 핫플’이라 불리는 곳들을 다녀온 뒤에도 늘어지게 낮잠을 잘 수 있었고, 전시·모임·행사 같은 삶의 질을 높여주는 활동들도 정말이지 손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이 어느새 너무도 당연해졌다. 마치 원래 서울에 살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서울은 점점 더 낯설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그저 일상의 한 조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울역은 꽤나 세련되었고, 서울의 위상은 흐른 세월만큼이나 높아졌다.


지금 나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퇴근 후엔 서울에 있는 내 집으로 돌아와 쉬고, 저녁을 먹고, 혼자 잠에 드는 반복적인 일상을 산다. 더 이상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 그래서일까. 이 일상은 내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것.

그리고 결국 이루게 된 것.

그리고… 그리고…


4. 꿈은 이루었을 때보다 품고 있을 때 더 반짝인다고 했던가. 서울에서 사는 것을 비롯해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어떤 꿈이나 물건, 사람, 혹은 공상은 이루기 전에는 그토록 갖고 싶고, 닿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다가도 막상 이루고 나면 왜 그토록 허무해지는지.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군가는 부러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모든 것에 감사해지고, 초연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들도 언젠가는 다 이뤄질 거라는 희망이 솟아오르면 어느새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

내가 그렇게 오래도록 꿈꿔왔던 것.

그리고 결국엔 이루게 된 것.


5. 그렇기에 요즘의 나는 꿈을 향해 더디게 나아가는 날들 속에서도 내 인생의 고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치 출국을 앞둔 사람처럼 설렘을 느낀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과연 수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연료 삼아 빛나는 곳이 아니던가.


어쩌면 삶이란 이처럼 무뎌지는 꿈들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가능성에도 온 마음을 기울여보면서.


그래서 오늘도 나는 모든 가능성이 숨겨져 있는 이 찬란한 도시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꿈꿔본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도시이자, 삶의 터전인 이곳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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