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달리는 코스에서 어느 길목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풍겨온다. 근처에 혹시 빨래방이 있나 둘러보지만, 보이는 건 조금은 허름한 중국집뿐이다.
그 향은 잊으래야 결코 잊을 수 없는 향이다. 처음 간 뉴욕 길거리 곳곳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바로 그 향기. 해외에 가면 각 나라마다 특유의 공기와 향이 있다. 일본에서는 길을 걷다가도 마치 백화점 1층에 들어선 듯한 화장품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곤 했다. 그러다 여행 중 들른 드럭스토어에서 ‘판매 1위’라는 문구가 붙은 향수를 시향 해봤는데, 그게 바로 도쿄 거리에서 스치듯 맡았던 바로 그 향기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필라테스를 하던 중 정말 우연히 뉴욕에서 맡았던 바로 그 향을 다시 맡게 되었다. 워낙 숫기가 없어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잘 걸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혹시 이 기회를 놓칠세라 망설임 없이 말을 건넸다.
“저… 혹시 향수 뭐 쓰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분은 향수가 아니라 아마 섬유유연제 향일 거라고 답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 향이 다우니 에이프릴이라는 제품임을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한 제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향수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은 향에 늘 마음이 끌렸다. 엄마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헤라 향수가 나의 첫 향수에 대한 기억이다. 비록 그 향을 맡을 대상은 같은 반 친구들뿐이었지만, 나는 늘 좋은 향을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시절, 누구나 하나씩 두르던 버버리 스타일의 목도리에 조금만 뿌려도 충분했을 향수를 나는 여러 번 겹쳐 뿌리곤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기가 선생님께서 누가 이렇게 향수를 진하게 뿌렸냐며 얼굴을 찌푸리시던 모습이.
고등학교 때엔 에뛰드 샤워코롱에 빠져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그걸 줄곧 뿌리며 다녔다. “왜 이렇게 냄새가 좋냐”는 질문에, 나는 “내 살냄새야”라고 답하고 싶어 향이 진한 바디로션도 열심히 발랐다. 그리고 바야흐로 대학교 신입생 때엔 온갖 서치를 다해 빅토리아 시크릿의 바디미스트가 향이 좋다는 정보를 알아내었고, 평소보다 두둑하게 받은 세뱃돈으로 해외 홈페이지에서 처음 물건을 사었다.
나의 정식 첫 향수는 페라가모 인칸토 참 EDT였다. 올리브영에서 약 4만 원 정도의 정가를 주고 샀었다. 향이 진하지 않아 샤워를 갓 마치고 나온듯한 은은한 향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외출할 때마다 뿌리곤 하였는데 아마 지속력이 좋지 않아 향이 그리 오래 가진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대학생 용돈에 맞는 랑방 향수 라인을 차례대로 사용하며, 그때그때 끌리는 향수를 섞어 쓰기 시작했다.
향기는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어떤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아주 강력한 도구다. 익숙한 향을 맡는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떠오르거나 지난 시간이 꿈처럼 아득하게 피어오르기도 하니까. 오죽하면 ‘향수에 젖다’라는 표현마저 있을까.
8월이 되어서 그런지 숨 막힐 듯하던 더위가 그래도 한풀 꺾여 선풍기로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유독 더웠던 날씨 때문인지 요즘엔 7년 전인 2018년 생각이 자주 난다. 아니면 달릴 때마다 맡는 섬유유연제 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 감각은 둔해지고, 이제는 옛날의 ‘나’를 ‘나’라고 부르기에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날 미소 짓게 하는 건 바로 향수 같은 기억들. 그런 기억이 있었나 싶을 만큼 희미하면서도 진한 과거의 향기 덕분에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아직 좋은 향을 남기고 싶은 날들이 많다. 아직 뿌리지 못 한 향수들도 많다. 아직 걸어야 할 길도, 머물 향기도 많은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