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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다

각자의 최선

by 최다은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끝맺을 때,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나?”

“최선을 다 한 게 맞나?”


그 질문은 게으름을 경계하는 장치였다. 어떤 일이든 대충 하는 걸 싫어해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어쩌면 나에게 유독 엄격한 사람이어서…. 그 질문을 습관처럼 되뇌어 왔다. 그러나 ‘최선’이라는 말은 놀랄 만큼 주관적이다. 정확한 기준이 없다면 나의 최선이 누군가에겐 차선일 수 있고, 누군가의 최선이 내게 차선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는 “사랑해”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걸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 말이 누가 먼저, 얼마나 자주 나오느냐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그 문장 앞에만 서면 쭈뼛대는 그들에게 나는 먼저 “사랑해”라는 말을 선물처럼 안겨주곤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곧잘 자신이 먼저 못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내가 먼저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사랑해”라고 똑같이 답하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겐 어렵지 않았던 그 일이 그들에게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운한 일이 생겨 괜히 혼자 토라졌을 때, 싸움 끝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혹은 피할 수 없는 갈등이 눈앞에 놓였을 때.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비슷했다. 내가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날카로운 말들 속에 가려져 있는 나의 진심이 무엇인지 차분히 풀어 설명하는 것.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당신에게서 듣고 싶은 말과 받고 싶은 행동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내가 바란 건 단순했다. 그들도 나처럼 마음을 꺼내 보여주고,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그 약속을 진심으로 믿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보여준 최선은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내가 나쁜 놈이야”


라는 짧고 형식적인 사과.


그리고 가끔 무언가 노력하고 있다는 표시라도 하듯 남긴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나는 그들이 “사랑해”라고 내게 말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긴 하니?”


그렇게 숱한 싸움과 이별을 반복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가다간 결국 끝내 헤어질 거라는 걸 그리 잘 알면서도.


나는 점점 처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확증을 요구하게 됐다. 마치 대충 한 숙제를 꼼꼼히 검사하며 지적하는 선생님처럼.


그때 나는 그것이 상처 입은 마음과 헐거워진 사랑을 지키는 최선이라 믿었다. 이별이란 단어가 우리의 모든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예견된 이별은 결국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나는 그들의 최선을 하나씩 복기했다.


아플 때마다 사다준 간식거리

기념일마다 써준 손편지와 카드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기꺼이 나서 준 순간들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최선이 내가 바란 최선이 아니었을 뿐. 그렇다면 내가 한 최선도 과연 그들이 알아주었을까. 그 답을 들을 길이 없음을 알면서도 괜스레 꺼내어보는 물음.



110V 제품을 220V 콘센트에 아무리 꽂아도 작동하지 않듯이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걸 알아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나의 최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최선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쉽고 편한 길이다.


결국 각자의 최선이라는 건 너무 주관적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상처 내지 않으려 애쓰는 배려와 내가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공감 없이는 서로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래가는 사랑에는 지름길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누가 더 잘했고 못했는지 따지며 눈물만 삼키는 상처투성이 사랑은 부디 그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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