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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다

비워야 채워진다

by 최다은

4년을 함께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가장 허무했던 건 따로 있었다. 그와 쌓아온 시간들이 ‘이별’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무력하게 잘려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한 현실이었다. 우린 헤어졌으니까. 머나먼 헐리웃 영화처럼 쿨하게 친구로 지내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으니까.


그럼에도 나에겐 가족이자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그를 단 한 번의 결말로 지워버리는 건 왠지 유치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간의 나였다면 당연히도 함께 찍은 사진과 번호, SNS의 연결 고리까지 단번에 정리했을 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와의 이별이 이상하게도 나쁘지만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원래 SNS를 잘하지 않는 그였기 때문일까.


우린 그렇게 헤어진 상태 그대로 각자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가끔은 좋아요도 누르며 지냈다. 난 그게 꽤 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세상이 두 쪽 난 것처럼 호들갑 떨 필요가 뭐 있나.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를 팔로우에서 끊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슴이 쿵 하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말없이 끊어낸 그의 손길이 괜스레 야속하게 느껴졌다. 헤어진 지 1년이 다 되어 가던 시점이라 더 그랬다.




고등학교 때 사귄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더 서툴렀다. 직접 마주 보고 말할 용기가 없어 손편지로 이별을 고했다. 그날 저녁, “진심이야?”라는 메시지가 왔다. 마음이 떠난 지는 오래였지만, 그의 가정사 때문에 차마 끝내지 못하던 사이였다.


그는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했다. 나는 그를 매몰차게 내칠 수 없어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다른 사람과 가까워진 나는 그를 전 연인이라 하기엔 멀고, 친구라 하기엔 애매한 사이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눈치챈 걸까.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불쑥 화를 냈다. “우리 친구라면서.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때 깨달았다. 정리되지 않은 관계에 다치는 건 나만이 아니구나.




찾아보면 ‘비워야 채워진다’는 뜻의 사자성어가 많다. 헌 옷을 버려야 새 옷을 살 수 있고, 지난 관계를 정리해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땐 생각을 비워야 새로운 바람이 스며든다.


최근 케케묵은 카톡방들을 정리했다. 갈 곳 잃은 손가락이 나가기 버튼 위에서 망설이던 날이 많았다. 남아 있는 그 시절의 다정한 대화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자꾸 흔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머뭇거리다 보면 앞으로 다가올 좋은 인연들마저 놓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진, 채팅, 의미 없는 기록들을 한꺼번에 지웠다. 조금은 슬플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이제는 그 모든 게 과거라는 사실만 더욱 선명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다. 미워한다는 건 그 사람이 아직 내 안에 있다는 증거니까.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힘든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


상처 준 이를 미워하지 않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노력하고 싶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사랑은 빈 마음 위에 새로이 그려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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