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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니&마가리타

by 최다은

DAY8

콜럼버스 데이

느지막한 아침, 커피 한 잔을 하기 위해 밖을 나왔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은 터라 아침은 건너뛰기로 했다. 뉴욕에 있는 동안 사실 나는 마음에 드는 카페를 별로 찾지 못했다. 애초에 카페에 대한 기준이 높은 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지금껏 내가 갔던 대부분의 카페는 식사와 술을 겸하는 레스토랑이거나 테이크 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곳뿐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카페에 있으면서 책을 읽거나 다이어리를 쓰는 등의 일을 하려 했던 나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뉴욕에 있는 카페들은 일찍 문을 닫곤 했다. 오후 5시 혹은 6시 안에 닫는 카페가 주를 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만큼은 내가 세운 기준에 만족하는 카페에 꼭 가고 싶었다. 우선 첫째, 커피가 맛있어야 하고 둘째, 앉을 공간이 충분해야 하며 셋째, 분위기가 아늑했으면 했다. 나는 엊그제 제리가 알려준 yelp앱으로 내 주변 카페들을 둘러보았다. 마침 마음에 드는 카페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나는 그곳에 가기로 했다. 내가 간 카페는 밖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이 다 차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길을 끈 것은 테이블 곳곳에 한 두 개씩은 꼭 놓인 맥북이었다. 나는 맥북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댄다거나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데 열중하는 그들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지금이 대학교 시험기간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나는 곧장 카운터로 가 스콘과 바닐라라테를 시켰다. 그리고, 각자의 메뉴를 기다리는 공간에 서서 기다렸다. 커피가 나오는 공간이 붐비는 걸로 보아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가는 사람들도 꽤 많은 모양이었다. 주문과 동시에 바리스타는 즉시 커피를 제조해냈다. 카페는 오픈 주방 형식이라 나는 그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뚝딱 라테 아트를 만드는 바리스타의 숙련된 솜씨에 나는 감탄을 표했다.


혼자 앉을 만한 마땅한 자리가 없어 나는 여러 사람이 앉아있는 넓은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선 내가 시킨 스콘과 바닐라라테를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랩탑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스콘과 바닐라라테를 먹는 나의 모습이 튀어 보일 정도였다. 그때 마침 유니온 스퀘어에서 만난 데이빗에게 문자가 왔다. “퍼레이드 보러 안 가?” 나는 뜻밖의 소식에 부리나케 답장을 보냈다. “무슨 퍼레이드? 어디서 하는데?” “오늘 5th 애비뉴에서 퍼레이드 하잖아. 11시 30분부터 시작했으니 한 번 가봐.” 나는 그의 문자에 급히 남아있는 커피를 비웠다. “너는 안 와?” “나는 오늘도 일하느라 못 가.”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나는 이미 시작된 퍼레이드를 보러 가기 위해 카페에 나와 근처 지하철역을 향했다. 다행히 지하철을 타고 얼마 안 가 5th 애비뉴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긴 출구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심드렁한 표정의 검은 개가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 녀석의 검은 목줄 옆엔 충성을 맹세하는 황금 배지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춰 잠시 그 녀석을 관찰하기로 했다. 그새 구경꾼들은 많아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중국 꼬마들은 신이 나 그 녀석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녀석의 목줄을 붙잡고 있던 경찰은 재잘거리는 꼬마들에게 영어로 무어라 설명을 했다. 꼬마들의 눈이 반짝였다. 까만 눈의 그 녀석도 그것이 제 일이라는 듯 얌전히 드러누워있었다. 하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녀석의 두 눈이 나는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슬픈 눈의 검은 개를 지나쳐 출구를 나오자 이미 많은 사람이 빽빽이 도로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에 두 뺨이 차갑게 젖었다. 비록 하수구 위지만 바리케이드 옆 빈자리로 들어가 겨우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퍼레이드는 이미 시작한 모양이었다. 뿌연 안개가 자욱한 흐린 날씨였지만 많은 사람이 콜럼버스 데이를 기념하며 5th Avenue에 모여 있었다. 줄곧 역사책으로만 접한 ‘콜럼버스’라는 사나이. 내가 뉴욕에 와서 이 퍼레이드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느니,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했다느니 한 사실은 내겐 그저 머나먼 역사적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콜럼버스’라는 인물은 한국과 그리 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퍼레이드를 보고 나서 나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실이 이들에게는 이렇게 큰 기념이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광대한 세계사를 피부로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깃발을 흔들며 힘차게 거리를 걷는 많은 이들의 긍지를 말이다.



퍼레이드는 오래도록 성대하게 이어져 갔다. 바리케이드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아낌없는 환호와 호응을 보내주었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손에 꼭 쥔 채 끝없이 펼쳐져 있는 5th avenue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은 내내 흐릴 전망 같아 보였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스콘과 라테가 들어있던 배도 완전히 꺼져버렸다. 밥을 먹기 위해 나는 식당가가 모여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퍼레이드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탓에 혼잡한 도로를 빠져나오는 일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족족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기 때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마저도 경찰들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다. 어찌어찌 퍼레이드 현장을 겨우 빠져나온 나는 더 이상 식당을 알아볼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기진맥진 지친 나는 문을 연 아무 식당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단지 적당한 가격의 적당한 포만감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가격과 적당한 포만감 그 둘의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굶주린 내가 들어간 식당은 점심때라 샐러드 메뉴밖에 팔지 않는 펍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릭 샐러드를 주문하고 헛배라도 불리기 위해 시원한 병맥주도 한 병 주문했다. 곧 커다란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인 샐러드가 내 앞에 놓였다. 황금 빛깔의 코로나 맥주도 한 병 나왔다. 맥주병 위엔 앙증맞은 레몬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무지막지한 샐러드 양에 놀랐다. 순간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며칠 동안 먹이를 찾지 못한 어미 곰처럼 나는 순식간에 내 앞에 놓인 무더기의 샐러드를 먹어치웠다. 맥주 한 병 몫의 취기 또한 차갑게 식은 몸을 데워주었다. 그 때문일까. 눈꺼풀이 내려오고, 몸은 금세 나른해졌다. 나는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퍼져있기로 했다.


황소상과 인증샷

숙소에서 쪽잠을 자고 나오니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몸을 감싸고 있는 피로가 완전히 다 해소된 것 같진 않았다. 몽롱함을 떨쳐 내려 노력하면서 나는 월스트릿을 가기로 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펼쳐진 거리는 온통 먹거리투성이었다. 각종 푸드 트럭이 즐비한 거리는 맛있는 냄새로 흥건했다. 나를 덮치는 온갖 음식 냄새를 벗어나 나는 돌진하는 황소상 주변을 얼쩡거렸다. 황소상 주변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황소상 뒤에 서 있는 줄이 줄어들기를 바라며 별안간 필름카메라를 들고 황소상 주변을 쭈뼛거렸지만, 줄이 줄어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황소 뒤에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소의 커다란 엉덩이는 레드카펫의 포토라인 못지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오면 황소 엉덩이 밑으로 기어들어 가 색이 바랜 중요 부위를 어루만지며 하얀 이를 내보이기 바빴다. 나 또한 기다란 트렌치를 바닥에 질질 끌며 황소 엉덩이 밑으로 들어가 부와 번영을 꿈꾸며, 황소의 두툼한 중요 부위를 매만졌다.


낯간지러운 촬영 시간이 끝나고, 나는 찍힌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몇 장의 사진 속엔 내가 느낀 어색함과 불편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 사진은 누가 봐도 자기 차례가 다가와 기쁜 관광객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나는 사진을 확인한 즉시 바로 지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진이 잘 못 나온 나의 모습이 아니라 사진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지금껏 해오던 대로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내 눈에 담는 그대로의 여행을 즐기면 되는데 나는 거기서 뭘 더 기대한 걸까? SNS에 떠도는 수많은 여행 인증샷들. 나 또한 그것들에 의해 마음이 급해진 걸까?



사람들에겐 각자마다 자신만의 여행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그 무엇도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 나는 그것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남의 여행 방식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자 노력한다. 어딜 꼭 가야 하고, 무얼 꼭 먹어야 하고, 무얼 꼭 해야 하고. 숙제같은 여행은 단연코 사절이다. 내가 나인 당연한 사실처럼 나의 여행 또한 나의 여행일 뿐이니까. 나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나의 마음이 함께하는 대로 그게 비로소 ‘나의 여행’이 아닐까. 조금은 어설플지라도 말이다. 나 같지 않은 이질감이 잔뜩 묻은 사진을 보고 나서 나는 다시금 나의 여행에 대한 결심을 바로잡았다. 그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여행을 하자는 결심. 그 결심은 나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풀턴 센터

드라마 세트장 같이 꾸며진 고풍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멀끔한 양복을 입고 발걸음을 서두르는 월가의 회사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일의 월가는 나의 상상과는 다르게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무채색 하늘에선 조금씩 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충전해놓은 체력을 다 써버린 나는 진득이 엉덩이를 붙이고 쉴 곳이 필요했다. 부드러운 빵조각과 맛있는 커피. 그거면 충분한데. 어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곳곳마다 테이크 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조그만 공간뿐이었다. 번번이 허탕을 치자 나는 카페에 갈 생각을 포기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시곗바늘이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내겐 배를 채울만한 달콤한 디저트와 목을 축일만 한 시원한 커피가 더욱더 절실해졌다. 결국 나는 내 맘에 드는 어떠한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냉기가 감도는 풀턴 센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은색으로 꾸며진 풀턴 센터는 내가 마치 첨단 도시 속 어느 한 공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찬바람이 나부끼는 밖의 날씨보다 왠지 모르게 조금 더 찬 기운이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런데 풀턴 센터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를 맡게 되었다.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기분 나쁜 공기는 쉴 틈 없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코를 들썩여도 냄새의 근원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입구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라테를 손에 쥐고 나왔다. 카페테라스엔 좀 전엔 보지 못했던 남루한 행색의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혹여라도 괜한 일에 휘말릴까 싶어 황급히 그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목을 축일 커피도 샀으니 나는 그대로 카페 옆에 있는 컵케잌 가게로 들어가 먹고 싶은 컵케이크를 골랐다. 내가 풀턴 센터에 온 이유였다. 그렇게 왼손엔 컵케잌을, 오른손엔 커피를 든 채 나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있는 창가 앞에 엉덩이를 붙였다. 비록 내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지도 못하고, 비를 맞아 조금 춥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떤 것이든 배를 채울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컵케잌을 들어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으로 부드러운 달콤함이 와르르 쏟아졌다. 컵케잌은 과연 그 명성대로였다. 아이스 라테와도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 노인이 갑자기 괴음을 내며, 건물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동안 씻지 못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는 악취 이상의 깊은 냄새를 풍겨냈다. 그제야 풀턴 센터에서 풍긴 악취의 행방이 저 노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자코 있던 건물 안 경비도 그를 제지하려 다가가다 지독한 악취를 맡고선 코를 움켜잡았다.


홈리스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처진 이들은 다시 올라갈 방도 없이 그들만의 둥지에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몸을 움튼다. 뉴욕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하나둘 꼭 눈에 띄는 Homeless. 못 본 채 지나가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너무나도 가까이 살아있는 그를 마주하자 불현듯 나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남편, 또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그는 과연 어떤 사정으로 저 지경까지 가게 되었을까?


자신에 대한 추측은 그쯤으로 해두라는 듯 노인은 입고 있는 바지 아래로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설마. 하지만 불결한 짐작은 예상에 적중하고 만다. 노인이 입고 있는 바지 뒷면은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갔다. 뒤이어 그는 신체의 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선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노인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옷깃이라도 닿을까 홍해를 가르듯 황급히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건물 창가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는 일상에서 빈번히 겪는 일이라는 듯 미세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 각자의 할 일을 해낼 뿐이었다.


차이나 타운

해가 저무니 날이 부쩍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차츰차츰 내려앉을 즈음, 나는 차이나타운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여러 영화의 배경에 등장했던 차이나 타운을 떠올리며, 나는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비가 와서 그런지 아니면, 낮이 아닌 저녁이라서 그런지 길가엔 사람의 행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매일 사람이 붐비던 맨해튼 중심가에 있다 보니 사람이 없는 차이나 타운은 어쩐지 음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차이나 타운에 오기 전에 미리 알아둔 식당에 가기로 했다. 딤섬이 유명한 맛집이었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골목을 헤매고 헤매 나는 겨우 가고 싶었던 식당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식당 앞은 이미 많은 대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가려면 내게 남은 시간은 퍽 여유롭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옆으로 즐비한 중식당 중 사람이 제법 있는 곳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온 따듯한 차를 홀짝이며, 나는 닭다리 산채 덮밥이란 메뉴를 시켰다. 손님을 응대할 때도, 주문 전화를 받을 때도, 그들끼리 대화를 할 때도 과연 중국인들의 큰 목청은 도드라졌다.


곧이어 커다란 닭튀김과 잘게 썰린 산채 조각들, 그리고 흰쌀밥이 담긴 그릇이 도착했다.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숱하게 봐온 바로 그 플라스틱 그릇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흰쌀밥에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왠지 제대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포크와 나이프가 아닌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이루어진 식사. 나는 포근한 흰쌀밥을 한 술 떠 입 안에 넣었다. 음식의 온기가 미끈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고소한 닭튀김 살, 아삭한 산채, 부드러운 쌀밥. 세 가지의 조화는 탁월했다. 나는 밥 한 톨도 아까워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시간이 지난 미지근한 차도 찬 몸을 데워 주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길가엔 아까보다 사람이 더 줄어든 것 같았다. 인적 드문 장소에서 혼자 길을 거닐다 보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지하철역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티니&마가리타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Lexington Avenue에 도착했다.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길을 오가며 상점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이윽고, 약속 시간인 10시가 가까워지자 “Are you on Lexington ave?”라는 문자와 함께 데이빗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을 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과연 내 우려대로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하니 의사소통은 더욱더 힘들었다. 그는 Lexington Avenue에 도착한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시트콤에서나 흔히 볼법한 상황이었다.


“Where are you?”라고 묻는 데이빗에게 나는 눈앞에 놓인 거리의 풍경을 하나하나 묘사해주었다. 얼마 안 지나 내가 나왔던 지하철 출구마저 눈앞에 보였다. “여기 Lexington Avenue역이 보여.” “잠깐, Lexington Avenue역이라고?” 데이빗은 하나의 실마리를 얻은 듯 내게 물었다. 그렇게 상황 판단을 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물음표 가득한 이 숨바꼭질은 모두 다 나의 착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약속 장소인 Lexington Ave 63 ST에 가야 할 것을 잘못된 장소인 Lexington Avenue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게 된 걸까? 내막을 살펴보면 이렇다. 약속 시간 전, 데이빗은 분명 내게 ‘Q나 R선을 타고 가면 Lexington Ave 63 ST에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라는 문자를 보냈었다. 그러나 데이빗의 문자를 본 나는 ‘Lexington Avenue’만을 머릿속에 입력한 뒤 6호선 라인에 있는 Lexington Avenue에 나와 데이빗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 파악을 한 데이빗은 재빨리 내게 “Take a taxi, you will get here in 5 minutes.”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급히 내 앞을 지나는 택시를 잡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택시를 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택시 안 미터기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눈을 돌린 것도 잠깐, 나는 미터기에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금액이 올라갈수록 두 손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얼마 남지 않은 여행 경비에 한 푼이 아쉬운 터라 운동화 밑창이 닳도록 걸어 다녔건만. 그것이 다 무색하게 10달러를 택시비로 날려버리게 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데이빗의 말대로 정말 5분여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을 숨긴 채 택시에서 내렸다. 그러자 곧 저 멀리서 데이빗의 모습이 보였다.



데이빗은 자연스레 자기가 잘 알고 있다는 곳으로 길을 안내했다. 우리는 Maya라는 멕시코 음식점에 들어가 마티니 한 잔과 마가리타 한 잔을 주문했다. 콜럼버스데이 퍼레이드가 이야기의 서두가 되어 나는 내가 본 것들과 들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주문한 마티니와 마가리타가 나왔다. 내가 마티니를 마시는 건 생애 처음이었다. 평소 술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잘 마시지 않는 내겐 큰 도전인 셈이었다.


마티니 하면 다들 컵에 비스듬히 기대어있는 올리브를 능숙하게 베어 먹고, 품위 있게 입을 적시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마티니를 한 입 머금음과 동시에 나는 연이어 터져 나오는 기침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독한 마티니 때문인지 데이빗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지 얼굴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데이빗에게 마티니가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다고 한 입도 더는 못 먹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이내 친절하게 자신의 마가리타와 나의 마티니를 바꿔주었다. “나는 원래 술 잘 먹어.” 그가 보여준 호의에 나는 허세가 섞인 그의 말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마가리타는 마티니보다는 그나마 조금 덜 독한 편에 속했지만, 술이 약한 나는 그마저도 독하게 느껴져 잘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술보다 그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는 일이 뭐야?” “나는 조그만 IT 회사를 다니고 있어. 난 그 회사의 부사장이고, 우리 보스는 너와 같은 한국인이야.” “아 진짜?” “응, 코리아 타운에서 한식도 자주 먹으러 갔어.” “한국 음식? 어떤 거?” “코리아 바비큐도 먹어보고. 웬만한 건 다 먹어본 것 같아.” “맛있었어?” “응, 나 한국 음식 좋아해.”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금세 마티니를 비워냈다. 그가 내어준 내 앞의 마가리타는 아직 일정한 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덧 가게 안엔 데이빗과 나만 남은 듯했다. 그때 마침, 우리는 가게 직원에게 영업시간이 다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데이빗은 자리를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나갈 때가 다 될 때까지도 잔을 비우지 못한 걸 확인한 데이빗은 내 앞에 남아있는 마가리타를 들어 단숨에 해치웠다. 술을 잘 먹는다던 그의 말은 그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시간이 늦어 뉴욕의 밤거리는 적막에 둘러싸였다. 가게를 나온 우리는 뉴욕의 밤거리를 잠깐 걷기로 했다. 시간은 오후 11시를 넘어갔다. “슬슬 근처 지하철역으로 가야겠다.” “그래.” 우리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거리엔 은은한 가로등 불빛, 그리고 우리 둘 뿐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선 데이빗이 내게 물었다. “여기가 바로 우리 집인데 잠깐 올라왔다 갈래?” “글세….”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지 말고 위에 올라와서 좋은 음악이라도 듣고 가.” 시큰둥한 나의 반응에 데이빗은 내게 또 한 번의 제안을 했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내 남자 친구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 나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에둘러 거절을 표했다. “어차피 네 남자 친구는 한국에 있지, 뉴욕엔 없잖아. 여행까지 와서 남자 친구 눈치나 볼 거야?” 데이빗은 나를 그의 집에 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나는 그런 데이빗의 모습에 그가 나를 하룻밤 상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즉시 그와 나 사이에 선을 제대로 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절대 나쁘게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굳이 남자 친구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오늘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어. 미안.” “그래. 그럼 네 맘대로 해.” 데이빗은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여기로 쭉 가면 지하철역 나오는 거 맞지?” “응, 쭉 가면 나올 거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기 집이 있는 건물로 휙 들어갔다. 데이빗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순간에 돌변한 그의 태도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작별을 함부로 대하는 그의 모습에 찝찝한 뒷맛이 가득 밀려왔다. 그러나 별안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적막에 둘러싸인 뉴욕의 밤거리를 나 홀로 걷는 수밖엔.


시계 토끼

시간이 됐다고 어수선을 떨던 시계 토끼는

금세 저 깊은 토끼 굴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도 그를 따라 시커먼 굴속으로 몸을 던지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되면 폼 나고 멋지게 살 거야.

뭣 모르던 나이에 꿈꾸던 환상의 유리 조각들.


뾰족한 유리 조각에 찔끔 피를 흘리는 지금의 나.


나도 그를 따라 시커먼 굴속으로 몸을 던지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같은 자리에서

종종걸음으로 자취를 감추는 시계 토끼


그를 따라 굴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어른이 되어서일까?

어른이 되지 못해서일까?


이제 저 밑에 뭐가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은

나는

결국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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