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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한 잔의 적당한 취기

by 최다은

DAY 6

코리안 데이 퍼레이드

아침 일찍부터 도로 위에 토속적인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태평소, 꽹과리, 해금, 아쟁…. 광화문에 갈 때면 종종 들려오던 그 멜로디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바로 인터넷을 뒤져보니 10월 6일은 다름 아닌 코리안 데이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리게이트 밖에 서서 잠깐이나마 퍼레이드를 구경하기로 했다. 통제된 도로에는 샛노란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한 차례 지나가더니,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를 펄럭이며 걸어갔다. 그 뒤를 이어서, 근엄한 분위기의 뉴욕 경찰들이 나팔 소리와 북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들을 끝으로 퍼레이드는 막을 내린 듯했다. 나는 원래 가려던 길을 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자 이내 방탄소년단의 신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로 마주한 한국은 생각 이상으로 반가웠다. 뉴욕 길목에서 들려온 익숙한 노랫말, 그 속에서도 나는 뜨거운 뭉클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라멘 먹기는 힘들어

눈을 뜨자 평소보다 몸이 무겁다. 뉴욕에 온 지 어느덧 6일째. 퉁퉁 부은 두 다리와 물집을 터뜨린 두 발에도 휴식이 필요했다. 오늘은 왠지 썰렁한 속을 뜨끈하게 적셔줄 라멘이 당겼다. 결국 나는 예정되어 있던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숙소 근처의 유명한 라멘 집에 가기로 했다. 주말 점심이라 그런지 가게 앞엔 벌써 줄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줄을 선 가게는 일본 현지에서도 유명한 라멘집이었고, 그래서 이렇게나 줄이 길었던 것이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줄을 선 뒤에야 나는 겨우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들린 것은 우렁찬 목소리의 “이랏샤이 마세~!(어서 오세요~!)”였다. 이마에 반다나를 질끈 묶은 익숙한 차림. 나는 그 차림을 한 직원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서양인이었기 때문이다.


줄에서 벗어나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독서실처럼 일일이 칸이 나뉜 곳이 나타났다. 일반적인 식당 풍경과는 사뭇 달라 당황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는 눈치껏 내가 받은 번호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허나 문제인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직원이 몇 번 내 앞에 놓인 발을 들어 무어라 말을 하고 갔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가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내 자리의 발이 올려졌다. 나는 그대로 그를 불러 세워 주문을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직원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답답해하는 눈치였다. 그때 갑자기 그 직원은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 내게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주문표를 낚아채갔다. ‘아, 줄을 설 때 미리 작성한 표를 직원에게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주문과 동시에 온몸의 식은땀이 서서히 멎어 들기 시작했다. 이걸 몰라 몇 분 동안 쩔쩔매고 있던 꼴이라니. 나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졌다.


길었던 주문 시간 끝에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라멘이 나왔다. 면이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둥근 우동 스푼을 들어 국물부터 먼저 떠먹기로 했다. 입안 그대로 라멘의 고소함과 담백함이 전해져 왔다. 뉴욕에서 맛보는 라멘 맛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라멘을 먹는 내내 나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국물이 있는 음식은 또 오랜만에 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따스한 국물에 썰렁했던 속이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먼저 나온 라멘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는 줄을 서면서 미리 받은 리필 쿠폰으로 면을 더 추가하기로 했다. 배가 엄청 고팠던 터라 추가한 면이 나온 즉시, 나는 좀 전과 같은 속도로 남은 라멘을 먹어치울 수 있었다. 총 두 번에 걸친 식사가 끝이 나고, 나는 마침내 배가 불렀다. 배가 부름과 동시에 내 머릿속엔 낮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계산을 마치고(이 라멘집은 계산을 하러 갈 때에도 미리 받은 번호키를 가져가야만 했다. 번호키가 없으면 게산이 불가하다는 직원의 말에 나는 자리에 놓고 온 번호키를 가져오느라 또 한 번 진땀을 뺐다.), 나는 곧장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포만감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쉼표

두어 시간 낮잠을 자고 나니 뿌옇던 정신이 맑게 갰다. 오후가 조금 지난 시간, 나는 책과 다이어리를 챙겨 가까운 카페에 가기로 했다. 카페에 도착해서 나는 초코 크루아상과 아이스 카페 모카를 시킨 뒤 창가 자리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언어가 온통 영어인 것만 빼면 한국에서 늘 보내던 일상을 그대로 뉴욕으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었다. 날씨는 비록 흐렸지만 혼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책장을 넘기는 여유로운 이 시간. 지나가는 시간에 초조해하지 않아도 되고, 분주하게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숨 가쁘게 움직여 스치듯 잠깐 보는 풍경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흐르는 음악에 귀 기울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내겐 분명 소중한 여행이라는 사실을 나는 진정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쌓여가는 빨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세제를 사러 마트에 갔다. 도착한 마트는 웬만한 물건은 1달러 이하로 파는 곳으로 요전에 왔던 Jack’s 99 store였다. 넓디넓은 마트를 돌고 돌아 나는 겨우 세제 코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은 5일. 딱 반절이 남은 셈이었다. 세탁기를 한 번만 돌리면 묵은 빨래는 얼추 해소될 것 같았다. 갖가지 종류의 세제가 즐비한 틈에서 나는 그나마 용량이 제일 적은 세제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눈을 굴렸다. 제일 싼 것이라 해도 6,000원을 웃도는 가격. 어쩔 수 없이 묵직한 미니 세제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대엔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이슬람 여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에게 친절함은 사치다. 계산대에 서서 물건을 계산하는 일이 하루의 전부인 양 그들의 두 눈엔 모두 무료함이 가득 차있다. “Thank you.”라는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녀는 묵묵히 다음 계산을 이어갈 뿐이다.


와인 한 잔의 적당한 취기

늦은 밤, 소호에서 만난 마크와 숙소 근처 와인 바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리엔 생각보다 토요일 밤을 즐기러 나온 많은 사람이 있었다. 상점가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네온사인 불빛 없이 어두웠다. 영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 유리창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길가에 울리는 시끄러운 대중가요, 발에 밟히는 무수한 전단지들. 번잡한 우리나라의 번화가와는 달리 뉴욕의 밤거리는 왠지 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10시에 보자는 약속과는 다르게 마크는 15분쯤 늦게 얼굴을 보였다. 그는 차가 막혔다는 뻔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내게 늦어서 미안하단 말을 하였다. 가게 안을 들어가자 많은 사람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둘이 앉을 테이블은 남아있었다. 나와 마크는 화이트 와인 한 잔과 레드 와인 한 잔을 각각 시켰다. 늦은 시간에 보는 터라 따로 먹을거리는 주문하지 않았다.



웨이터가 테이블 위 두 개의 빈 와인 잔에 우리가 시킨 와인을 따르려고 다가왔다. 그는 따르려는 와인병을 높이 들어 수려한 솜씨를 뽐내었다. 내 잔에 깨끗한 화이트 와인이 따라지고, 남은 건 마크가 시킨 레드 와인 한 잔이었다. 그러나 그가 너무 자신만만해하던 탓일까? 그는 화이트 와인이 조금 차있던 내 잔에 레드 와인을 섞어버리고 말았다. “Oh, no!” 마크는 맥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주눅 들지 않고, 당장 새 와인 잔을 가져왔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각 두 와인 잔에 알맞은 와인이 따라졌다. 나와 마크는 각자의 와인에 살짝 입을 적신 뒤 웨이터가 따라준 와인을 그대로 마시기로 했다. 웨이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리는 끝까지 익살스러운 그의 행동을 보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와인잔을 조용히 부딪친 뒤 우리는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했다. 첫 만남에 할 수 있는 얘기라곤 서로의 국가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프랑스에서 온 마크는 뉴욕에서 클럽 파티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뉴욕 길거리에서 만났다는 이유로 당연히 미국인일 거라 생각했던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마크는 한국에선 홍상수 감독과 그의 내연녀 김민희, 그리고 김기덕 감독을 알고 있다고 했다. “칸 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알게 됐는데 그의 영화들은 다 내 취향에 맞는 것들이야.” 그리고 그 말에 이어 “나는 주류 메이저 영화보다 소규모 인디 영화가 더 좋아. 소소한 매력이 있잖아.”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가 한국의 유명 셀럽이나 스포츠 선수가 아닌 영화감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다음 주 화요일부터 2주간 파리에서 휴가를 보낼 계획이야.” 그는 잔에 담긴 레드 와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거야?” “응, 본가가 파리에 있어.” “나도 기회가 되면 내년에 꼭 가고 싶어.” 그러자 그는 불현듯 눈을 반짝이며 파리에 대한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 네가 파리에 가면 정말 좋아할 거야. 너는 파리에 꼭 가봐야 해.” “그래? 파리는 어떤 곳인데?” “사람들도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고, 풍경도 아주 낭만적이지.” 그는 파리의 좋은 점을 줄줄 나열하며, 내가 틀림없이 파리를 마음에 들어할 거라는 확신에 찼다. 그의 말을 들으니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있지 않은 데도 파리로 떠나는 나의 모습이 자꾸만 기대가 되었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 얘기를 나누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좀 전보다 더욱 활기가 넘쳤다. 190cm가 넘는 키를 가지고 있는 그로 인해 내 옆엔 마치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굽이치는 걸음걸이로 나를 숙소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는 나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방에 도착해 외투를 벗는 도중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Very nice seeing you. Hope you made it home safely. Good night.’ 와인 한 잔의 적당한 취기가 오른 몸 위로 이불의 포근한 촉감이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사랑이 전부라 믿는 당신에게

사랑이 전부라 믿는 당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사랑이 전부라 생각하며 행동하라는 말뿐이다. 그렇다면 뉴욕과 사랑에 빠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전부를 뉴욕으로 채우는 일. 거리를 굴러다니는 시나몬 색깔의 낙엽들, 얼기설기 얽혀있는 횡단보도, 후덥지근한 지하철 플랫폼,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아파트 청소부,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블록마다 진행하는 지하철 공사 현장, 호루라기 소리를 뽐내는 교통경찰, 공원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청설모, 웅장함을 뽐내는 엠파이어 빌딩, 골목길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뉴욕의 모든 것에 사랑을 덧입힌다.


Love is all. 사랑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엄마 손을 꽉 잡은 아이의 모습, 따듯한 포옹을 나누는 연인의 모습, 어깨를 대고 말없이 앉아있는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나는 사랑을 느낀다. 먼 곳에서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질 때면 나는 그렇게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보고 느끼며 그 애틋함을 대신하곤 했다. 전시 상황에 비상식량을 조금씩 꺼내 먹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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