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니온 스퀘어

by 최다은

DAY 7

브로드웨이

뉴욕에서 맞는 두 번째 휴일, 오늘은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는 날이라 평소보다 조금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우선, 나는 첫날에 가지 못했던 식당을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뉴욕에 온 첫날, 몇 번을 뱅뱅 돈 기억에 이번엔 다행히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물 안에 들어서자 아뿔싸, 예감이 좋지 않았다. 로비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 봐도 나는 얼추 상황 파악이 되었다. 로비를 지나 식당 안을 슬쩍 들여다보자 식당 안은 일요일 아침을 즐기러 온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나는 식당 입구에 서있는 직원에게 얼마 정도 기다려야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대기자 명단을 쓱 훑더니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라면 잠자코 기다렸을 테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자리를 떴다. 당장 어느 곳에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무작정 밖을 나섰다. 공연 시간은 오후 1시로 아직 시간이 좀 남은 상태였지만, 빡빡하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길을 걷다 식당으로 보이는 곳으로 바로 들어갔다. 아쉬운 대로 원래 먹고 싶었던 에그 베네딕트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확실히 길가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음식이 나오고,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식당 안을 채운 사람들을 구경하며 포크와 나이프 질을 했다. 급히 들어온 이곳은 비록 내가 고대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다 잊을 정도의 맛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배도 꺼뜨릴 겸 브로드웨이 근처 카페를 찾아 걸어갔다. 도착한 카페는 좁은 공간의 무난한 곳이었다. 나는 따듯한 라테를 주문했다. 이대로라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예정대로 공연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테를 비우는 즉시 나는 브로드웨이를 향해 움직였다. 길거리에 있는 상점 곳곳엔 얼마 남지 않은 할로윈을 맞아 귀엽게 장식을 해두었다. 한적한 길을 걸으며 내가 조금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의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은 주로 세 종류로 분류가 된다. 말티즈, 요크셔테리어, 포메라니안. 그러나 이 곳 뉴욕은 도시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소형견·중형견·대형견 구분 없이 모든 종류의 강아지를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풍경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강아지들을 스쳐지나 나는 오페라의 유령 상영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은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어 주변 풍경을 찍기로 했다. 필름 카메라 안에 적힌 숫자는 언뜻 36컷을 웃돌았다. 그러나 36컷을 다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분명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는 자동 필름 카메라이기 때문에 컷 수를 다 채우면 자동으로 컷이 감겨야 할 터인데 필름 카메라를 얻은 지 얼마 안 된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아무 소식도 없는 카메라를 들고 끙끙대다가 시간이 다 되어 나는 다시 상영관 앞에 갔다. 상영관 앞은 그새 줄이 생겼다. 간단한 가방 검사를 마치고, 나는 곧장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왜 카메라가 감기지 않는지 나 혼자 계속 끙끙댈 수밖엔 없었다. 곧이어 공연은 시작되었고,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카메라가 자동으로 감기지 않을 때는 카메라 밑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됐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결국 나는 필름이 들어있는 통을 열어보았고, 첫날부터 찍은 사진 36장은 모조리 빛에 날아가고 말았다.)


런웨이

Empire state of mind. 뉴욕에 오면 꼭 듣고 싶었던 노래 1순위. 빌딩 숲속에 헤드셋을 목에 걸고 걷는 한 명의 방랑자. 재생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들려오는 감각적인 비트. 이윽고 New York을 외치는 Alicia keys의 익숙한 보컬이 나오고, 나의 얼굴엔 반가운 웃음이 걸리게 된다. 온몸엔 짜릿한 전율이 흘러넘친다. 내친김에 나는 영화 <비긴 어게인>에 나온 노래도 재생 목록에 추가하기로 한다. 순식간에 영화에서 느꼈던 모든 감동이 전해져온다. 이 기분이면 나도 키이라 나이틀리처럼 한쪽 등에 기타를 둘러 메고 어디서든지 손가락을 튕길 수만 있을 것 같다. JAY-Z, Kanye West, Calvin Harris, Drake까지. 재생 목록엔 하나둘 나만의 뉴욕이 가득 차게 된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Ghostbusters 노래도 추가. 두 귀를 둔탁하게 때리는 비트에 맞춰 나는 황홀경의 입구에까지 발을 구른다.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걷는 이 거리가 곧 나의 무대. 뉴욕의 모든 구역을 모두 나의 무대로 만들 때까지 나의 당당한 워킹은 계속될 것이다.


유니온 스퀘어

공연을 보고 나오자 궂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하늘 틈 사이 화창한 햇빛이 갑작스레 쏟아져내렸고, 입고 있던 까만 가죽재킷이 덥게 느껴졌다. 나는 주말이라 북새통을 이루는 타임스퀘어를 날쌘 다람쥐처럼 빠져나와 그대로 유니온스퀘어를 가기로 했다. 유니온 스퀘어에 도착하자 느닷없이 미친 듯한 허기가 밀려왔다. 더 걸을 힘조차 없는 나는 역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 가서 프렌치토스트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계란물을 입힌 노란 토스트 위로 하얀 슈가파우더가 솔솔 뿌려져 나왔다. 한껏 당이 떨어진 나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정신없이 먹는 데에 열중했다.


배가 부르자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아직 한참 남은 원두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몇 시간 새에 날씨는 다시 바뀌어 반짝이던 햇빛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계산을 마치고 식당에 나왔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길거리 한복판에서 여러 예술 작품을 팔던 사람들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유니온 스퀘어의 이곳저곳을 담기 시작했다. 유니온 스퀘어엔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악기 케이스를 활짝 열어두고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들, 땅바닥에 누워 음악을 듣는 사람…. 그뿐만이 아니었다. 히피스러운 옷을 입고 연주를 하는 사람들,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는 사람 등. 나는 손목에 카메라 줄을 감아두고, 내 눈에 띄는 모습이 있으면 곧장 셔터를 눌렀다. 그때, 캐논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는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와 나는 사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나는 굳이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를 좁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화의 그물망을 촘촘하게 꿰매려는 노력 없이 만남 그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헤어져도 그것은 또 그것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어떠한 불순물 없이 천천히 맑은 시냇물처럼 흘러갔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때 즈음 우리는 빠른 시일 안에 얼굴을 보자는 의례적인 약속을 잡았다. 야무진 솜씨로 도토리를 까먹던 풀밭의 청설모도 흥미로운 듯 우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우리는 서로 핸드폰 번호를 교환한 뒤 각자의 카메라를 들고 각자의 피사체를 담기 위해 갈라졌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줄곧 자연스레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다양한 만남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곳. 그와의 만남은 내가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사계절 그 어디 즈음

벌써부터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곧 다가올 겨울을 보낼 이들이. 이곳의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은 어떨까? 어떤 풍경일까? 어떤 냄새가 날까? 아직은 후덥지근한 가을의 한 페이지에서 뉴욕의 사계절을 슬며시 떠올려본다. 봄을 맞은 센트럴파크에 소풍을 간다거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더위를 식힌다거나,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며 길가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흘겨본다거나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부분들을. 그것들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분명 근사할 것이란 확신이 든다. 나도 언젠가 뉴욕에서의 사계절을 완성하는 날이 올까? 사계절의 뉴욕을 경험하고 싶다. 각각 다른 맛의 조각 케이크를 맛보는 것처럼. 그러나 먼 훗날의 바람은 바람대로 남겨두고, 나는 다시 지금의 뉴욕에 집중해본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뉴욕의 가을, 그 한가운데에 서서.

keyword
이전 07화와인 한 잔의 적당한 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