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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같은 도시

by 최다은

DAY 4

MoMA

맥도날드에서 빅맥, 프렌치프라이, 딸기 밀크셰이크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 뒤 MoMA에 갔다. 날이 흐린데도 불구하고 MoMA는 안과 밖 모두 구분할 것 없이 사람이 많았다. 나는 미리 챙겨 온 바우처를 티켓으로 바꾸고, 전시를 감상하기 전 밖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평화로운 기분에 빠져들 수 있었다.


잠깐의 구경을 마치고, 미술관 안에 들어서자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미술관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가드에게 티켓을 내민 뒤 걸음을 서둘렀다. 소리의 근원지로 보이는 2층에 도착했을 땐 벌써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틈을 조심스레 헤집고 들어가 보았다. 시야가 조금씩 트이고, 그제야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대로 보이는 곳에서 몇몇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큰 소리는 모두 퍼포먼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사람들은 점점 더 몰려들었고, 나는 이내 흥미가 떨어져 전시를 보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MoMA에는 고흐, 피카소, 앙리 마티스, 피트 몬드리안, 모네, 르네 등 어렸을 적부터 배우던 예술 작품들이 각 층마다 즐비해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교과서로 보는 것과 실제로 눈에 담는 것은 과연 천지 차이였다. 그들의 작품으로 하여금 명화를 잘 알지 못하는 나도 금세 예술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었다. 더욱이 내가 감명을 받은 것은 예술 작품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관람 매너를 지키는 MoMA의 관람객들에게도 감명을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영향으로 나 또한 관람 매너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뭐 하나 놓치지 않을까 싶어 작품 하나하나 꼼꼼히 눈여겨보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2시간 반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관람을 마치고 소파에 앉아 조금 쉬기로 했다. 몇 분 뒤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문 닫는 시간이 다 되어 밖을 나오니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챙겨 오지 못한 나는 급한 대로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다. 발이 묶이게 된 것은 미술관을 빠져나온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를 피하는 사람들로 출구가 혼잡해지자 미술관 직원은 사람들에게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전하였다. 결국 몇몇 사람들이 빗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신발이 최대한 젖지 않게 조심하면서 지하철역으로 힘껏 뛰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지하로 내려오니 입고 있던 맨투맨은 이미 많이 젖어있었다.


꿉꿉한 공기 속, 나는 퇴근을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숙소와 가까운 34 해럴드 스퀘어 역에 내렸다. 밖으로 나오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 새 그쳐 있었다. 숙소는 바로 코앞에 있었지만, 나의 두 발은 멋대로 그릴리 스퀘어로 향했다.


그릴리 스퀘어

해가 지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많은 사람이 천막을 올린 가게에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목이 말라 아이스티를 산 다음, 비가 묻은 공원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밝고 행복한 얼굴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얽힌 대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문득 커다란 공허함이 나를 좀먹어왔다. 그제야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할 때 말고는 오늘 하루, 그 누구와도 말을 섞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여행을 하면 외로움과 같은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선택한 여행인 만큼 한껏 즐기기에도 모자랄 거라는 생각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함께하는 이 하나 없이 ‘혼자’라는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 누구도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말을 섞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다. 나를 둘러싼 군중은 오히려 내가 혼자 있을 때보다 나를 더욱 음울하게 만든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내 귀를 거슬리게 만든다. 남아있는 아이스티를 다 비우고 나는 한시바삐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서 빨리 행복에 젖은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다.


Yes or No

그릴리 스퀘어에서 벗어나 나는 뉴욕형 다이소라 불리는 Jack's 99 cent store에 갔다. 욱신거리는 허리에 붙일 파스도 사고,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구경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다이소라고 하기에는 넓디넓은 이곳을 어디부터 탐색해야 할지 나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침 저녁때에 맞춰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은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각자의 쇼핑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매장을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냉동식품, 시리얼, 과자, 욕실용품, 장식품 등등…. 그런데 아무리 돌아봐도 내가 사야 할 파스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물건을 진열하고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Where is pain patch?” 그러나 내 발음이 안 좋은 건지, 파스를 뜻하는 영어를 틀린 건지 그는 인상을 쓴 채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해서 물은 끝에 마침내 그는 진열된 한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Thank you.” 의례적인 고마움을 표하고 몸을 돌려 가려던 찰나 “Are you korean?” 이제 그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Yes.” 나는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게 따발총 같은 영어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멕시칸 특유의 발음이 더해져 나는 알아듣기가 더욱 힘들었다. “Yes or No?” ‘도대체 뭐라는 거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건지 내게 자꾸 대답을 강요하였다. “Yes, Yes.” 대답을 해야만 끝나는 게임이라면 아무 대답이라도 할 수밖에. 대답과 동시에 나는 어물쩍거리며, 그를 피해 그대로 달아났다. 그에게 일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한들 우리는 좀 전과 같이 끝없는 제자리걸음을 걸을 것이 뻔했다. What are you talking about? 그와의 대화는 내게 언어 장벽으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게 해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선물 같은 도시

배가 고프다. 길 곳곳에 생긴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와중에도 어김없이 배는 고파왔다. 내가 뉴욕에 온 지는 이제 고작 이틀. 하지만 단 이틀 만에 뉴욕의 팁 문화는 나의 진을 다 빼놓았다. 계산서에 적힌 음식의 값과 택스, 거기다 별도의 팁까지. 오늘은 머리 아픈 계산은 좀처럼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팁이 필요 없는 길거리 음식을 사서 숙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할랄 푸드는 뉴욕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떡볶이, 순대, 튀김 등을 파는 포장마차와 같은 것이다. 얼마 안 가 할랄 푸드 트럭이 눈 앞에 보였다. 나는 ‘더블 토핑’이란 메뉴를 주문하기로 했다. “Are you Korean?” 주문과 동시에 그는 바삐 손을 움직이며, 내게 물어왔다. “Yes.” 그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하자 그는 반갑다는 듯 막대한 영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곤란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그런 나를 위해 대화 속도를 천천히 늦춰주었다. 그는 조리 내내 변함없이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주문한 음식 외에도 빵 두 개와 바나나 세 개를 넉넉히 봉지에 넣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 얼굴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그늘을 발견한 것일까?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동하였다. “Thank you so much.” 그것이 내가 표할 수 있는 감사함의 최대 표현이었다.


그가 베풀어준 눈물겨운 호의에 그릴리 스퀘어에서 느낀 나의 우울은 금세 스르륵 녹아내렸다. ‘뉴욕은 내게 분명 선물 같은 도시야.’ 나의 발걸음은 좀 점과는 달리 무척이나 가벼워졌다. Have a nice day. 그가 건네준 묵직한 비닐봉지 위에 쓰여 있는 짧은 문장. 그 문장을 되뇌며 나는 무사히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화가

영화 속에 비친 풍경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간 저곳에 갈 수 있을까? 내내 마른침만 삼켰었다. 뉴욕에 가자, 마음을 먹고 나자 스케치가 시작되었고 비행기 표를 끊고 나서부터는 스케치 위에 진한 선이 그려졌다. 뉴욕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기억은 온통 흑백이었던 나의 그림에 선명한 색을 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색을 칠하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고, 그건 분명 신나는 일이었다. 여행을 마치면 내가 완성한 이 그림을 꼭 튼튼한 액자에 걸고 마리라 다짐했다.


여느 훌륭한 그림도 스케치부터 시작을 한다. 스케치가 끝나면 그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수월해진다. 우리는 모두 꿈을 그리는 화가가 될 수 있다. 마음속에 나만의 스케치를 그려보자. 나만의 색이 담긴 그림을 완성하는 언젠가를 꿈꿔보자. Like a 피카소, Like a 고흐, Like a 모네. 액자에 걸어둔 그림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을 때까지. 그때까지 베레모를 쓰고 색칠을 멈추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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