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전, 눈을 뜨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창문 위에 늘어진 블라인드를 올리는 일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건 겨우 맞은편 건물과 출근길의 사람들뿐이지만 그 생소한 풍경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뉴욕에 온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두꺼운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Good morning.” 옆을 슬쩍 돌아보니 어느 할아버지가 복도를 청소하고 계셨다. “Good morning.” 나도 얼떨결에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굿모닝. 정말 별 거 아닌 인사말이었지만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는 동안 나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번져갔다.
처음 보는 건물, 처음 보는 길목, 처음 맞는 공기. 새롭고 낯선 모든 것들이 몸속 안 세포 하나하나를 전부 일깨우기 시작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 한산한 거리를 빙 돌고 결국 들어간 곳은 스타벅스였다. 아직까지는 몸에 익은 익숙함에 기대는 것이 좀 더 편했다. 가까스로 계산을 마치고 받은 커피를 든 채 직행한 곳은 단연 창가 자리였다. 저마다의 아침을 보내는 이들 틈에서 나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눈에 보이는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에 저절로 눈이 굴러갔지만, 너무 빤히 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다.
창밖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질 즈음, 나는 다시 낯선 이곳에 새로운 걸음을 남길 준비를 했다. 밖을 나와 허리춤에 매달린 코트 줄을 매만지고 있던 그 순간. “Are you model?” 나를 향한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움직였다. 옆을 돌아보니 풍성한 곱슬머리의 한 청년이 서있다. “No.”나는 겸염쩍은 웃음을 지었다. “You look like a model.” “Thank you.”짧은 대화가 끝나고 청년은 내게서 멀어졌다. 일상에선 보기 드문 이런 사소한 에피소드가 과연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아침햇살 같은 화창한 예감이 드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새파란 이파리들이 무성한 공간. 달콤한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곳. 다이어리를 찾으러 가던 길목, 나는 우연히 브라이언트 파크 옆을 지나게 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 산책을 나온 사람 등…. 무채색 빌딩과 거리가 난무하던 시야에 싱그러운 파란빛 공간은 나의 시각을 일깨워주었다. 그와 동시에 높은 빌딩 틈 사이에 이런 평화로운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좀 더 걸으니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뉴욕 공립 도서관, 그 앞에서도 좀 전과 같이 많은 사람이 일상 속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평소 도서관에 가면 줄곧 느끼던 적막함과 고요함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언뜻 영화 속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스타벅스 다음 행선지는 여러 팬시상품을 팔고 있는, ‘파피루스’라는 문구점이었다. 매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끄는 카드 표지들이 핼러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핼러윈 외에도 각종 기념일을 축하하는 카드부터 깔끔한 디자인의 다이어리까지. 수많은 팬시상품의 구경을 마친 뒤에야 나는 NEW YORK이라는 대문자가 적힌 조그만 다이어리를 고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록’은 내게 꽤나 중요한 행위이다. 더욱이 핸드폰 속 메모장을 켜 간단히 기록을 남기는 것과 종이에 직접 펜을 굴리는 건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다이어리를 고르는 일은 표면적으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계산을 마친 뒤 문을 열고 나오자 꾸역꾸역 밀어 놨던 메마른 허기가 순식간에 나를 덮쳐왔다. 푹한 날씨로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와 어깨를 짓누르는 잡동사니들을 숙소에 두고 나는 메모해두었던 식당에 가기로 했다.
헤매지 않고 가려던 지하철역까지 단번에 온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블록을 몇 바퀴를 돌아도 내가 찾는 식당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노란 헬멧을 쓴 노동꾼들과 몇 차례나 눈도장을 찍었는지. 무의미한 걸음이 계속되자 이윽고 유리창 너머로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하는 이들마저 부러운 지경까지 다다랐다. 확신이 없는 걸음 끝에 겨우 발견한 건물 안은 고요했다. “May I help you?” 두리번거리는 내가 가여워 보였는지 건물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내가 찾고 있는 식당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아쉽게도 그 식당은 화요일엔 오전 11시 15분까지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 “Thank you.” 나는 마지못해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건물 안을 빠져나왔다. 식당을 찾아 헤매느라 보낸 시간 때문에 나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았다. 그렇게 들어간 식당은 태국 요리 전문 식당이었다. 파인애플 프라이 라이스, 그리고 다이어트 코크. 늦어버린 점심을 해결해줄 메뉴를 시키고 애피타이저로 나온 새우 과자로 입맛을 다셨다.
시킨 요리가 나오자 나는 한 번 든 숟가락을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하지 않던가. 빵이 아닌 밥은 텅 빈 속을 정성스레 채워주었다. 꺼진 배가 기분 좋게 불러오자 첫눈과도 같은 졸음이 두 눈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Tik Tok. 별안간 손목시계 속 바늘의 일정한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나의 목적지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타임스퀘어로 정해졌다.
따듯한 해가 비추던 하늘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뉴욕의 하늘은 그 새 칙칙한 무채색으로 탈바꿈을 했다. 나는 뉴스에서 자주 보았던 타임스퀘어에 홀로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었다. 내 옆의 십 대 소녀들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계속해서 요란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문득 ‘혼자’라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사무치게 다가왔다. 한국은 이미 한밤중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 조용한 핸드폰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이라도 듣기로 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니 그제야 나를 찾아온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삭힐 수가 있었다. 도로 위엔 얼기설기 얽혀있는 차들이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나는 나 혼자만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좀 더 많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자리를 옮기자 나와 같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그렇게 나는 낯선 이들과 부대껴 혼자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어폰을 끼고 있는 탓에 나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물어물 “I don’t know.”라고 답했다. 그와의 대화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나의 옆자리에 앉아 잠시 멈춘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는 내게 자기 이름은 Jerry라며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차갑고 축축한 손이었다. 나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을 한 층 낮추고, 제리와 사적인ㅡ이름, 국적, 나이, 직업과 같은 얘기ㅡ를 나누었다. 어쩌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떼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대뜸 제리는 내게 투어 가이가 되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십 분 남짓 나눈 대화가 전부인 그를 과연 믿어도 될까?’라는 생각에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뉴요커와 함께하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기에 이내 제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OK.” 제리는 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내 손을 끌어 우중충하고 혼잡한 타임스퀘어를 벗어났다.
제리가 내 손을 잡고 이끈 곳은 록펠러 센터였다. 록펠러 센터 앞은 많은 사람이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 나도 빈 벤치에 나란히 앉아 갖가지 화제를 입 밖으로 꺼냈다. K-pop, K-food, 그의 대학 얘기, 친구 얘기, 여행 얘기 등등. 번역기 어플에 의존하여 우리의 대화는 그럭저럭 잘 이루어졌다. 그와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때에 가까워졌다. 제리는 자신이 잘 아는 아이리쉬 펍이 있다며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걷다 보니 빽빽한 빌딩 틈으로 주황빛의 땅거미가 슬금슬금 내려앉았다.
펍에 도착해서 제리와 나는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 바 자리에 앉기로 했다. 그가 주문을 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쏟았다. 문득 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내 앞에 놓인 맥주 한 잔마저도 무척 생소해 보일 만큼. 창밖엔 큼지막한 스틸러스 국기가 바람결을 따라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이 모든 게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흘러간 오늘 하루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오래 자리를 비운 제리가 다시 돌아왔다. 그가 추천해준 맥주는 딱 내 취향에 맞았다. 제리는 내 입맛에 맞아 다행이란 눈치였다. 곧이어 보글보글 끓는 맥 앤 치즈가 도착했다. 뜨겁게 끓고 있는 맥 앤 치즈는 한눈에 봐도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냅킨 속에 감춰져 있던 포크를 들고 샛노란 맥 앤 치즈를 입에 넣었다. 강렬한 치즈 맛이 금세 입안을 뒤덮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맥 앤 치즈가 담긴 그릇이 하얀 바닥을 내보일 때 즈음 제리는 내게 뉴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곳은 출입이 자유로운 어느 호텔이었는데 펍이 있는 곳에서 조금 많이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나는 오늘 꽤 많은 길을 걸은 터라 먼 곳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고, 그런 내 마음을 제리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 말을 들은 제리는 내 생각이 그렇다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구경시켜준다는 제안을 했다. 지금껏 꾹 눌러둔 경계심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나의 직감에 기대 나는 또 한 번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제리는 익숙한 듯 앞장서서 길을 걸었다. 십 분 즘 걸었을까?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조용한 도로가 나타났다. 그의 집이 있는 아파트 문 앞에 들어서자 제리를 알아본 도어맨이 친절히 문을 열어주었다. 제리는 도어맨에게 나를 소개했다. “Hi.” 엉겁결에 도어맨과 악수까지 나눈 뒤 나와 제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생소한 구조, 생소한 엘리베이터. 그의 집에 있는 층에 다다를수록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제리의 가족이 모두 외출한 탓에 그의 집은 조용한 적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실 한 편에 자리한 향초에서 새어 나오는 쓸쓸한 체리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천천히 둘러볼 새도 없이 나는 제리의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삐걱, 나무 바닥에서 소리가 났다. 신발을 벗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집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방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옷가지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침대 위엔 닥터드레 헤드셋, 말려있는 이불 등이 보였다. 이케아에서 연출한 방과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우리는 푹신한 그의 침대에 앉아 유튜브로 케이팝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다. 그는 흥겨운 듯 추임새를 넣으며 흔들흔들 리듬을 타기도 했다. 제리의 여동생도 좋아한다는 BTS 얘기까지 마저 마치고, 우리는 ‘미스터 키티’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고양이를 보러 테라스로 향했다.
그곳은 마치 잘 꾸며진 정원과도 같았다. 노랗게 빛나는 꼬마전구들과 벤치, 텃밭, 나무 등. 나는 넓고도 근사한 그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럭셔리한 삶을 살고 있었다. “Mr.Kitty” 그의 다정한 부름 속에도 고양이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녀석이 수줍음을 무릅쓰고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우리는 조금의 시간을 들여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미스터 키티의 털을 쓰다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리는 미안하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야경을 보러 옥상에 올라가기로 했다. 무거운 문을 열어 비상구 계단을 조금 오르자 사방이 뻥 뚫린 옥상에 다다랐다. 곱게 뻗어있는 선베드, 인공 잔디,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의 밤 풍경이 순식간에 나의 마음을 훔쳤다. 그 풍경은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별안간 눈을 떼지 못한 채 높은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도로엔 자동차 행렬이 까마득히 줄을 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감탄사란 감탄사는 모조리 다 쥐어짜 내었다. 그러자 제리는 커다란 웃음으로 내게 화답해주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나는 이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종일 걸은 탓에 나는 지친 몸을 한시바삐 푹신한 침대에 뉘이고 싶었다. 배웅을 나온 제리를 뒤로 하고 나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의 뉴욕 지하철은 꽤나 한산했다. 몸을 실은 지 얼마 안 되어 빠져나온 출구는 내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타임스퀘어 뒤편인 것 같았다. 지하철을 다시 타고 숙소 근처로 가자니 웬걸 한 번에 가는 노선이 없었다. 숙소까진 약 15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결국 다시 걷는 수밖엔 없었다. 무거운 피로감에 두 다리와 발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가는 도중 바로 코앞에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편의점에 들려 아침에 먹을 가벼운 요기 거리나 사가기로 했다. 세븐일레븐은 사실상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체인점이었지만 동네에서 줄곧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편의점이라기보다는 넓은 식료품점에 가까웠달까. 고심 끝에 나는 요거트 하나와 초록색 사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선 다시 숙소를 향해 걸어 나갔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거리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곧 가까운 거리엔 숙소가 있는 건물이 보였고, 길고 긴 하루는 그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