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잘 도착할 수 있을까?
공항에 가기 전까지 여행은 내게 설렘을 주면서도 은근히 성가신 짐과 같은 존재다. 여행의 전체적인 틀부터 준비해야 할 서류, 유심칩, 돌발상황 등등. 세세하게 여행 계획을 짜다 보면 여행을 가기도 전에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다. 알아야 할 정보는 뭐 이리도 많은지.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 속을 오랜 시간 동안 헤엄치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정보가 있다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차라리 인터넷이 없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현실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남은 여행 준비를 마치다 보면 눈 깜짝할 새 입국장에 서있는 나를 발견할 수가 있다. 몇 분 후, 내가 타야 하는 비행편의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나는 그토록 고대하던 여행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묘한 긴장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많은 이들도 각자의 짐을 들고 길게 늘어진 줄에 하나둘 합류하였다. 나도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산 빳빳한 트렌치 자락을 휘날리며 밤하늘을 날 준비를 서둘렀다. 45G. 장시간 비행에 대비하여 정한 복도 자리였다. 비행기 안은 출발을 앞둔 많은 승객들로 부산스러웠다. 별다른 짐이 없는 나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백팩을 안고, 출발을 기다렸다. 이윽고 머지않아 모든 승객이 자리에 앉고 출발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묵묵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비행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때를 마주하기로 했다. 고도의 굉음, 진동, 그리고… 마침내 이륙. 나의 여행은 창밖을 지나는 자잘한 불빛들과 함께 그렇게 시작되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마냥 설렘으로 가득할 수만은 없다. 특히,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은 더더욱 그렇다. 언어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 타국에서 벌어질 온갖 변수에 수많은 걱정과 근심을 자아낼 수밖엔 없기 때문이다. 설렘과 불안이 뒤죽박죽 섞인 내 마음은 마치 폭풍우를 만난 바다처럼 요란하게 요동쳤다. 지금부터는 나 자신이 나의 친구이자 보호자로서 굳건한 믿음을 공유할 수밖엔 없다.
비행기가 곧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과 함께 장장 열네 시간의 긴 비행이 끝이 났다. 뻑적지근한 두 다리를 제대로 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비행기에 내려 보딩 브리지를 빠져나오자 불편한 이를 위해 휠체어를 준비한 공항 직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이태원에서 흔히 보던 서양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무언가 함부로 행동을 하면 금방 제압할 것만 같은 포스를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 직원에 의해 공항 안에서도 이곳이 뉴욕이라는 사실을 쉽게 체감할 수가 있었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많은 한국인 틈에서 준비해놓은 서류 뭉치를 꺼내 나 홀로 가슴을 졸였다. 미국은 입국 심사가 엄하기로 유명한 국가다. 나는 출국 전 미리 해보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억지로라도 긴장을 풀어내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긴장했던 것과 달리 입국 심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그렇게 큰 산을 넘었다고 안심한 것도 잠시, 짐을 찾고 각자의 인연을 기다리는 많은 이들 틈에서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갈 곳을 알아서 척척 찾아 나서는 많은 이들 틈 속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별다른 방법이 없는 나는 우선 출구를 찾아 헤매었다. 그 순간, “May I help you?” 내 귀에 울리는 구원의 목소리. “Yes. I find Air Porter.” 나의 대답을 들은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했다. 밖을 향한 자동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덥고 끈적한 뉴욕의 공기가 얼굴 표면에 닿았다. 그것이 내가 뉴욕에서 들이마신 첫 공기였다.
그의 뒤를 따라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자 관광버스 옆엔 어느 검은 미니 벤이 세워져 있었다. 내 예상과는 다른 미니 벤의 모습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 미니 벤은 척 봐도 내가 찾는 공항버스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No thank you.” 짧은 영어를 얼버무리며 황급히 캐리어를 끌자 그는 끈질기게 내 뒤를 따라붙으며 흥정에 나섰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공항 안으로 들어가 그를 따돌리는 데에 겨우 성공했다. 그러나 내가 공항버스를 찾으러 몇 번씩이나 공항 주변을 헤매는 동안엔 공항 앞에 죽치고 있는 많은 택시&우버 기사들은 내 뒤를 졸졸 쫓으며 끈질기게 호객 행위를 펼쳤다. “Where are you going?” “Manhattan?” 찰거머리같이 달라붙는 그들을 따돌리는 데 나는 꽤나 애를 먹었다.
나는 좀처럼 공항 밖으로 탈출할 갈피를 잡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엇비슷한 풍경에 계속해서 똑같은 발자국을 남기며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약 10여 년 동안 지겹도록 마주한 다이얼로그, 영어 지문, 그리고 수많은 영어단어들…. 그것들을 그저 입으로 내뱉기만 하면 그만인데 나는 어쩐지 자꾸만 겁이 났다. 말 한번 거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는지. ‘이대로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당할 수는 없어.’ 흘러가는 시간 앞에 굼뜬 망설임은 버리고,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안내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Where is Air Porter?”라고 입을 떼자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공항버스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밖에 운행을 안 해. 네가 지금 이용할 수 있는 건 공항 트레인이나 택시뿐이야.”라고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 처음부터 끝까지 공항버스만 타면 그만일 거라는 나의 생각은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멘붕'이었다. 그렇게 나는 목적지를 잃은 채 그대로 JFK공항에 갇히고 말았다. 절망적이었다. 누군가 상의할 사람도,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우선 혼잡한 이곳을 벗어나고자 캐리어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마침 입국 심사 줄에서 몇 마디 말을 섞은 한국인이 내 눈에 보였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맨해튼 가세요?”
내가 말을 건 그는 현재 퀸즈에 살며, 뉴욕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맨해튼까지 가진 않지만, 괜찮다면 퀸즈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그곳에서 공항 트레인 타면 맨해튼까진 금방이에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는 좀 전에 만난 낯선 사람이며,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내 직감대로 눈앞에 있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나를 상대로 한 일종의 도박과도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와 그는 그가 부른 우버를 타고, 그의 자가용이 주차된 곳에 내렸다. “뉴욕에선 오랫동안 주차할 거면 내비나 블랙박스 같은 건 다 빼놔야 돼요.” “왜요?” “그냥 내버려 두면 돈 되는 건 다 가져가니까요. 창문 깨고 그냥 다 가져가요.” 그의 말에 나는 새삼 뉴욕의 치안 상태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뉴욕'이기 전에 '미국'이었다.
그의 차에 타서 우리는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행히도 그는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특별히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도로가 막혀 생각한 것보다 늦게 퀸즈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 눈앞에서 바로 맨해튼으로 가는 트레인이 지나쳐가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방금 지나간 열차가 오늘의 마지막 열차인 듯했다. “타세요. 제 말 듣고 여기까지 오신 거니까 다리 앞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거기서 우버 불러서 타고 가면 되실 거예요.” 그는 결국 발이 묶인 나를 위해 다리 앞까지 태워다 주는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10분 뒤, 자가용은 다리 앞에 도착했고, 나는 그와 짧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두 번째로 탄 우버엔 차 안 가득 달콤한 체리 향이 풍겼다. 코를 감싸는 쌉싸름한 체리향 그리고, 푹신한 뒷좌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습하는 긴장감에 나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구글맵이 알려주는 경로와 내가 가고 있는 위치를 대조하면서 차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하였다. 그것이 내가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맨해튼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은 바로 차창 밖의 반짝이는 풍경들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다. Midnight in New York. 환한 밤거리를 지나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맨해튼과 퀸즈는 정말 다리를 건너면 금방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부스에 쏟아지는 따듯한 물에 기대 몸에 달라붙은 추레함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제야 꾸역꾸역 밀어둔 잠이 노곤함과 함께 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는 낯선 침대에 누워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샤워를 마치고도 나를 감싸고 있는 흥분과 설렘은 쉽사리 진정되지가 않았다. 몇 시간 뒤면 직접 두 눈에 담을 뉴욕이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나 아침을 맞기 위해선 어찌 됐든 눈을 감아야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밀어 두고, 억지로 눈을 감으니 생각보다 쉽게 잠이 찾아왔다. 장시간 비행으로 쌓인 피로감 때문일 것이리라. 그렇게 나는 다가올 아침을 고대하며, 조금씩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나의 환상 속에 늘 존재하던 이 도시에 마침내 발을 들이게 됐다. 결코 짧지 않은 열흘 동안의 여정은 훗날 내게 어떤 빛으로 반짝일까? 까만 밤을 환히 비추는 찬란한 도시의 빛. 나는 아름다운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다.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기만 하던 허상이 눈앞으로 생생히 펼쳐진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과연 이 순간을 잊을 수나 있을까? 처음의 모든 순간이 다 그러하듯 몸속을 울리는 심장 소리만이 더욱 빨라진다.
나의 미래를 채우는 것은 온전한 나의 몫임을.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빈 스케치북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어떤 것으로 채워나갈지 기대가 되기 때문일 것이리라. 흐릿한 밑그림 그 위에 덧입힐 여러 색깔들을 떠올리다 보면 흡족한 미소는 금세 텅 빈 얼굴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곳이 바로 나의 오아시스야. 더딘 걸음 끝에 찾아온 숨 가쁜 환희. 오늘 밤만큼은 이 감정에 취할 수 있도록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있고만 싶다.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