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속에 여행이 움트게 된 때를 떠올려보면 아마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일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책, 영화, TV를 통해 바라본 낯선 여행지들을 가슴속에 어렴풋이 품곤 했었다. 그러고선 그곳에 있는 나의 모습을 머릿속에 줄곧 그려보곤 했었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단조로운 나의 일상에서도 자연스레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 떠나진 못하더라도 그렇게 내 안엔 여행에 대한 조그만 불씨 하나가 심어지게 되었다. 노트 한쪽을 빼곡히 채운 버킷리스트, 그 안에서도 여행은 단연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까닭인지 여행에 대한 불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그라들었다. 기약 없는 나중, 언젠가, Someday…. 졸업을 하고 나서 성인이 되고 보니 내겐 여행 말고도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그러다 2016년, 나는 드디어 여행에 대한 불씨를 틔우고 싶어 졌다. 총 한 달간의 평범한 유럽여행이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여행 계획을 세우다 보니 그제야 내 안에 조용히 잠든 불씨 하나가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점부터 아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내 계획대로만 일이 흘러갔다면 좋았겠지만, 변수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부모님의 반대였다. 그대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안 좋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진 않았고, 50만 원에 달하는 위약금과 함께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에 물벼락을 끼얹은 꼴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하게도 나는 몇 달간 슬럼프를 겪을 수밖엔 없었다. 지금도 나는 ‘만약 그때 내가 여행을 떠났다면?’이라는 물음을 종종 하곤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나는 뉴욕에 가기로 다짐했다. 주위에서 ‘왜?’라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라고 대답할 수밖엔 없었다. 그냥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뉴욕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뉴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ㅡ빽빽한 고층 빌딩, 그 틈에 우뚝 솟아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예술·패션·음악 등 모든 트렌디한 것들의 집결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도시ㅡ이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그저 뉴욕에 가서 직접 보고, 듣고,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막연하게 보고, 듣는 걸로만은 내게 부족했다. 살면서 다들 마음속에 품은 여행지가 한 곳쯤은 있을 텐데 내겐 뉴욕이 그러했다. 그중 내가 큰 영향을 받은 건 바로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드라마였다. 캐리, 사만다, 샬롯, 미란다. 그녀들이 활보하던 뉴욕에 직접 가서 뉴욕이란 도시가 얼마나 매력적인 도시인지 몸소 확인해보고 싶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할지도 모르겠다.
졸업논문을 쓰는 와중 나는 109만 원에 달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전과 같이 부모님의 반대가 따라왔지만 전과 달리 더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그깟 여행 하나로 유난을 떤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내 여행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국 엄마, 아빠는 못 이겨 나의 여행을 허락해주었고, 나는 세상을 향한 작은 배에 수월히 돛을 달 수 있게 되었다. 여행에 대한 불씨가 그저 불씨로만 남지 않게. 기약 없는 나중을 ‘지금’으로 바꾼 순간, 그렇게 나는 뉴욕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열흘 동안 뉴욕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을 기록한 이야기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고,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다. 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예전과는 달리 여행을 수식하는 거창한 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여행은 개인적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꼭 먹어야 하는 것들, 꼭 가봐야 하는 곳들, 꼭 해봐야 하는 것들이 리스트로 만들어져 넘쳐나기 시작했다. 여행은 여행 그 자체만으로도 개개인에게 잊을 수 없는 선명한 기억을 안겨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여행마저도 남의 잣대에 기대 평가하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여행은 새롭고 특별하기 마련인데, 과연 각자에게 특별하지 않은 여행이 있을까? 그렇다면 결국 여행의 가치는 누군가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정해진다는 것. 즉 세간에 떠도는 여행이 아무리 특별하다고 불린다 할지라도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어떠한 의미조차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보통의 여행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주위 가까운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줬으면 좋겠다. 잠에 들기 전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아니면 밥을 먹으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정해버린 특별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사소함을 늘 기억하곤 한다. 나만의 경험을 통해 그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특별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10일간의 여행으로 사소한 여행 속에 숨겨진 특별함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