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그만 사치

by 최다은

DAY 10

혼자라는 건

뉴욕에 온 지 어느덧 열흘째. 출국은 내일이었지만 사실상 오늘이 뉴욕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희한하게 오늘은 내가 뉴욕에 있었던 그 여느 날보다 날씨가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 내가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가을 날씨였다.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나는 맑은 날씨에 기분이 괜스레 좋아졌다. 그리고, 뉴욕에서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할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크루즈 티켓은 첫날에 미리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나는 그 근처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선착장에 가까운 음식점들은 월가에 있었다. 그러나 월가엔 내가 가고픈 마땅한 음식점들이 보이지 않았다. 배는 고파오고, 시간도 더는 지제할 수 없기에 나는 Westville이라는 음식점에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간 시간은 하필 딱 점심시간이어서 음식점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줄이라도 서야 하나 싶어 카운터를 기웃거렸지만 누구 하나 나와보는 이 없었다. 직원들은 매장 안을 바쁘게 돌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혼자’라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 한국이든 뉴욕이든 지금껏 혼자 밥 먹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오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 온 나를 쳐다보는 많은 시선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황급히 식당 밖으로 나와 화단 옆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선 꽉 막힌 가슴을 쓸어내었다.



시간이 흐르자 다행히 나의 상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참아왔던 배고픔도 밀려왔다. 나는 다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했다. “Hi, How are you?”카운터를 지키던 직원이 식당에 들어온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Good.”식당 안은 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공황 발작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진 않았다. “There's only a bar seat next to the kitchen. Are you okay?” 직원은 손가락으로 저 끝에 있는 바 자리를 가리켜보았다. 보아하니 사람들이 많아 남은 자리는 그곳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별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Sure.”이라 답했다.


메뉴판을 열자마자 나는 맥 앤 치즈를 먹기로 마음을 굳혔다. 오늘은 마지막 날인만큼 미국스러운 식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맥 앤 치즈만 먹어서 배가 찰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나는 맥 앤 치즈와 핫도그, 그리고 느끼한 음식을 위한 아이스티도 한 잔 시키기로 했다.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혼자’라는 사실은 정말 아무렇지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긴 커녕 각자 자신의 일행들과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얼마 안 되어 뜨겁게 달궈진 맥 앤 치즈와 보라색 양파가 잔뜩 올려진 핫도그가 앞에 놓였다. 나는 먼저 아이스티로 목을 축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스티에선 아무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잘못 먹었나 싶어 다시 한번 더 컵에 꽂혀있는 빨대를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은 여전했다. 이윽고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아이스 티는 레몬 또는 복숭아 맛이 나는 아이스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아이스 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맛을 굳이 따지자면 차가운 홍차에 가까웠다. 나는 황당한 마음에 직원에게 말해볼까도 했지만, 영어로 이리저리 따지기도 성가시고 맛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에 그냥 이 아이스티를 마시기로 했다.


크루즈 타임

식사를 마치고 밖을 나왔다. 배가 든든하니 꺼져있던 활기가 다시 새롭게 돌기 시작했다. 선착장은 걸어서 3분이면 족했다. 화창한 날씨 속, 선착장 근처엔 자전거를 타는 사람, 선베드에 누워있는 사람, 벤치에 앉아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이 보였다.


오후 1시 이후부터 배는 1시간 단위로 출발을 하기 때문에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줄을 서는 곳에 도착을 했을 때엔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무더기로 나타났다. 나는 그들과 함께 줄을 서고, 검표원에게 표를 내민 다음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갔다.


배가 올 때까지 나는 선착장 옆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하늘과 맞닿아있는 이스트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저 멀리서 멋지게 물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육중한 크루즈의 모습이 보였다. 크루즈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무언가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갑판 위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가을 햇볕 때문에 무척이나 뜨거웠다. 정수리가 꼼꼼히 익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1시간 동안 과연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갑판 가에 있는 그늘을 찾아 출발할 때까지 그곳에서 몸을 식히기로 했다.


곧 배가 출발한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오고 가이드로 보이는 사내가 마이크를 잡고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배가 출발하자 육지와 점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코앞에 보이던 거대한 빌딩 숲도 점점 멀어져 갔다. 주위에선 호들갑 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거품을 가르고 배는 빠르게 나아갔다. 멀어져 가는 뉴욕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일어나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갑판 위는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같이 탄 한국인 단체 관광객은 대부분 장년층 또는 노년층으로 그들은 풍경이 바뀔 때마다 셀카봉을 위로 쳐들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밀쳐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비교적 한산한 갑판 가 부분으로 가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원한 강바람이 머리칼을 마구 풀어헤쳤다. 나는 손이 미끄러져 들고 있는 소지품을 물속으로 빠뜨릴까 아찔했다.


배가 강을 헤엄쳐 가는 내내 나는 날씨가 좋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르디 못해 시린 강물과 청명한 가을 하늘…. 날씨가 좋았기에 이 모든 걸 선명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배는 어느덧 자유의 여신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명백히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의 함성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앞다퉈 프레임 가득 자유의 여신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뉴욕의 랜드마크를 실제 눈에 담게 된 감회는 역시나 남달랐다. 자유의 여신상을 직접 눈에 담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나는 누군가와 말할 틈도 없이 나 홀로 그 뜨거운 감동을 묵묵히 삼켜내었다. 배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 부근에서 잠시 머물다가 천천히 선회했다. 리버티 섬에 있는 많은 여행객들은 마치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나는 마침내 뉴욕의 끝까지 모두 점령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치 게임 속 모든 퀘스트를 깨고, 최종 호칭을 얻은 것만 같은 뿌듯함이었다. 배는 마지막 코스인 브루클린 브릿지 부근에 도착했다. 까마득했던 빌딩들이 가까워진걸 보니 이젠 육지까지의 거리도 정말 머지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배에서 내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꼭 여행의 끝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끝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나는 새삼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모조리 다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브루클릿 브릿지에 잠깐 멈춰 있던 배는 이내 육지 방향으로 속력을 내었고,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계속해서 가고 있었다.


덤보

선착장에 내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바닥은 역사가 오래되어 보이는 돌길이었다. 늘 아스파트를 밟으며 느꼈던 감각과 또 다른 감각이 신발 밑창을 타고 전해져 왔다. 돌길이 끝이 날 무렵 나는 어느 조용한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뉴욕답지 않은 조용한 거리에 나의 마음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었다. 한쪽엔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이 정답게 뛰노는 모습이 바로 보였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이었다. 곧 얼룩말 무늬 횡단보도와 뉴욕의 상징같이 느껴지는 공사 길이 눈에 보였다. 잠시 느꼈던 고요함이 무색하게 나는 또다시 시끄러운 뉴욕을 향해 걷게 되었다.


하이스트리트-브루클린 브리지 스테이션에 내려 덤보를 향해 가는 길. 인적은 드물고, 거리는 한적했다.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이렇게 나 홀로 덩그러니 길에 있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는 것은 나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거슬렸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도로에 드릴을 뚫는 소음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한적함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십 여분 정도를 걸으면 분명 도착할 줄 알았는데 덤보는 도대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다리 밑을 왔다 갔다 하며 한참을 헤매다 곁눈질로 몇몇 사람들이 빠지는 길목을 무작정 뒤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찾아 헤매던 덤보의 모습이 눈앞에 떡하니 펼쳐졌다.


덤보 앞은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덤보가 보이는 길목에만 유난히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나 또한 사진을 찍고 있는 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가방 안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한쪽 눈을 감은 채로 몇 번 셔터를 누른 나는 그 이후엔 어떠한 물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덤보를 감상하기로 했다. 어떠한 왜곡 없이 두 눈에 비친 풍경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것. 그것이 내겐 최고의 감상 방법이었다. 나는 저 멀리 그림처럼 걸려있는 덤보를 두 눈으로 묵묵히 바라보았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덤보가 주는 잔상은 마음 깊이 남았다.



윌리엄스버그에 가기 전,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길가엔 눈을 씻고 둘러봐도 조그만 편의점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덤보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스타벅스에 들어가기로 했다. 생수 한 통 값인 2.5달러를 계산하고 나서 나는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카페 안은 각자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이들로 조용했으며, 왠지 모를 오후의 느긋한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서 잠시 동안 쉬면서 충분히 목을 적셨다. 그러고 나선,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윌리엄스버그에 가기로 했다.


J선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

덤보에서 윌리엄스버그에 가기 위해선 F선을 타고 업타운으로 올라간 다음 J선으로 갈아타서 다리를 건너야 했다. F선은 코니아일랜드행과 자메이카행이 있었다. 나는 둘 중에 무얼 타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때 마침 플랫폼에 코니아일랜드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얼렁뚱땅 코니아일랜드행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열차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다음 역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20분이면 되는 거리를 30분 남짓의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겨우 Delancey St역에서 J선을 탈 수 있었다. 구글 맵을 들여다보고, 지하철 노선을 살펴보느라 지친 나는 몸을 등받이에 바짝 붙여 녹초가 된 몸을 풀어내었다. 그때였다. 지하철 창밖으로 바깥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구간은 4호선을 탔을 때 이수에서 동작으로 가는 구간과 비슷했다. 항상 어두컴컴한 터널만 보다 탁 트인 바깥을 보게 된 나는 비스듬히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나는 마치 놀이공원에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곧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그대와 같아

우리는 어쩌면 일상 속에서 ‘당신, 참 멋져’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닐까?

속눈썹이 눈에 찔려 누른 핸드폰 전면 카메라

눈꺼풀을 뒤집고 눈 안으로 들어간 속눈썹을 애써 찾는 중

“You look so nice."

눈이 휘둥그레 목소리가 들린 옆쪽을 바라보니

빛나는 미소를 뽐내고 있는 그대.

“Thank you."

빛나는 미소엔 똑같이 빛나는 미소로 화답을.

‘nice하다’는 그 말에 내 마음은 금세 부드러운 봄바람이 살랑

‘당신 참 멋져’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자랑스러워지는 가벼운 말 한마디

말 한마디가 주는 강력한 힘.

굳은 얼굴을 쉽게 무너뜨리는

그 한마디를 건넬 줄 아는 그대가 되고 싶다.


윌리엄스버그

Marcy Av역에서 내린 나는 한국에서 미리 봐 두었던 카페를 찾아가기로 했다. 분명 좀 전에 지하철역에서 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고, 순간 나는 낯선 거리에 나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여기서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 해도 아무도 모르겠지? 나는 그 생각에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도 빼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브루클린에 온 지는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시끄럽고 정신없는 맨해튼이 그리웠다.


다행히 얼마 걷지 않은 곳에서 식당과 세탁소가 있는 마을이 나왔다. 나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도로엔 힙합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차들이 쌩쌩 지나다녔고,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나를 이방인 보듯 흘겨보았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작은 소리에도 일일이 귀를 기울였다. 카페는 생각보다 꽤 멀었다. 걸어도 걸어도 도저히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걷는 내내 나는 담벼락에 그려진 그라피티를 감상하며 카페에 가는 것을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안 가면 또 언제 가볼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게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내 보기로 했다.



나 홀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나는 어느 외딴섬에 와있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스케이트 보드를 밀며 미끄럽게 인도를 나아가는 꼬마 녀석과 카페테라스에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아기 엄마 등이 거리를 채우고 있긴 했지만 어쩐지 잔잔한 고요함이 감도는 이곳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외톨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로 마침내 Devocion(데보시옹)이란 거대한 몸집의 카페에 다다르게 되었다.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놀랐던 것은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새파란 이파리들이었다. 그 벽의 전체는 자연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초록 잎들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페 한가운데엔 검정 가죽 소파가 놓여있었는데 그 소파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투명한 유리 천장을 통해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감상할 수가 있었다. 감각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힘들게 걸어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온 내내 내가 먹은 커피는 주로 아이스 라테로 이번엔 왠지 달짝지근한 캐러멜 마키아토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캐러멜 마키아토는 작은 사이즈로밖에 제공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나는 결국 전과 같은 아이스 라테를 시켰다. 커다란 아이스 라테를 받아 든 나는 힘들게 온 만큼 카페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30여분 정도 카페에 있던 나는 실내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깝다는 생각에 남은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긴 했는데 당장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카페와 가까운 곳에 있는 그랑 페리라는 공원에 가기로 했다. 그곳은 일몰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강 수면 위로 황금색 가루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강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낭만적으로 해가 저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강 너머에 있는 빌딩 사이로도 주황빛 물감이 차츰 번져갔다. 눈에 담기에도 아까운 이 순간을 함께할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으면…. 해가 저물어 가자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 라테가 나는 왠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조그만 사치

퇴근 시간이 되자 거리엔 제법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뉴욕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첼시에 있는 유명한 스테이크 집을 찾아갔다. 어두운 가게 안은 로맨틱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2층의 어느 한 자리로 웨이터에게 안내를 받은 나는 립 아이 스테이크 하나와 독일산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시켰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나는 지금껏 내가 다녔던 캐주얼한 식당과는 다른 이 점잖은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웨이터는 화이트 와인을 먼저 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툼한 두께의 스테이크를 내왔다. 내 앞인 놓인 두툼한 두께의 스테이크는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두께였다. 나는 나이프를 들어 쓱싹쓱싹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선홍빛 육즙이 그대로 그릇 밑으로 흘러내렸다. 풍부한 육즙의 스테이크는 입 안에 맴도는 과일 향의 와인과 무척 잘 어우러졌다. 그러나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기 한 덩이일 뿐인데도 생각보다 양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나는 남은 스테이크를 그대로 두고, 와인 한 잔 몫의 기분 좋은 취기를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맛있는 식사는 기분을 좋게 하는 제일 간단한 방법이다. 10만 원이 육박하는 한 끼. 평소엔 엄두도 못 낼 가격의 한 끼는 여행에 와서나 부릴 수 있는 사치다. 구태여 남은 잔고에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고, 사치를 부렸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아무 문제없이 계산을 마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적당한 날씨의 밖을 나섰다.


만남과 만남이 공존하는 곳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내가 간 곳은 뜨거운 함성 소리, 경쾌한 박수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흥겨운 분위기의 타임스퀘어였다. 밤의 타임스퀘어는 낮의 타임스퀘어보다 더욱더 활기가 돋았다. 한 편에선 주먹 막 한 머리를 양쪽에 묶은, 새빨간 헤어밴드의 사내가 싱싱한 등 근육을 내보이며, 능숙한 쇼맨십을 뽐내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유쾌한 웃음을 쏟아내기 바빴다. 각국 관광객들의 집합소인 타임스퀘어. 이곳에선 모르는 사람들이 원을 그린 채 웃음을 공유하는 일이 꽤 흔하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한 줄로 죽 늘어선ㅡ전혀 통일성이 없는 키를 가지고 있는ㅡ남성들을 화려한 묘기로 뛰어넘는 일이었다. 새빨간 헤어밴드의 그 사내는 NYC라 적혀있는 매표소까지 멈춰 서있다 이내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 많은 구경꾼들은 기대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한 줄로 죽 늘어선 남성들 옆을 빠르게 지나치기만 하고 어떠한 공중묘기도 선보이지 않았다. 기대에 찼던 사람들 모두는 허무한 웃음을 자아낼 뿐이었다. 그때, 느슨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또 다른 파트너가 다시 한번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엔 과연 새빨간 헤어밴드의 사내가 해낼 것인가? 많은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된 순간, 그는 멋진 공중제비를 돌며 완벽한 임무를 해내었다. 그의 파트너 또한 연달아 묘기를 선보이며 그들은 단번에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들의 공연은 그 이후로도 쭉 계속 이어졌다. 나는 구경꾼으로서의 몫을 마치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뉴욕을 떠나기 전 나는 이곳, 타임스퀘어는 꼭 다시 오고 싶었다. 휘황찬란한 네온 불빛이 흩날리는, 낮과 밤이 뒤섞인 축제 현장과 같은 이곳은 어쩌면 뉴욕을 가장 대표하는 공간이 아닐까? 만남과 만남이 공존하는 곳, 타임스퀘어. 이젠 이곳에도 작별을 고해야만 한다.


무거운 발걸음

지친 하루 끝, 숙소에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숙소는 타임스퀘어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되는 곳이다. 새까만 어둠이 물든 뉴욕에 나는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눌러댔다. 이대로 떠나기엔 아쉬운 것이리라. 힘차게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는 거리의 악사에게 나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동전 한 주먹을 털어 내주었다. ‘이제 진짜로 떠나는구나.’ 감출 수 없는 공허함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되돌릴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시간. 그 가운데에서 나 홀로 덩그러니 뉴욕의 마지막 밤을 버텨내 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한 밤바람은 나의 두 뺨을 차갑게 스친다.

keyword
이전 10화삶과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