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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다녀오고 나서

by 최다은
기억의 단편

여행을 다녀온 뒤 한국에서 보통의 날들을 보내고 나면 지난 여행은 금세 두 손을 살짝 스쳐 지난 한 줌의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뉴욕 땅에 처음 발을 들였던 선명한 그 순간마저도 그저 과거 속 하나의 단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첩에 휘갈긴 꼬부랑글씨들, 일정량의 메모리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진, 그리고 지갑에 꼬깃꼬깃 모아 온 영수증들이 그나마 지난 여행의 쓸쓸한 빈자리를 대신해준다. 어떤 날엔 ‘뉴욕에서 보낸 모든 날들이 그저 깊은 잠에 빠져 꾼 달콤한 꿈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재빨리 여권 한 페이지에 찍힌 도장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는다.


먼길을 찾아 나서 발견한 오아시스의 기억은 너무나 짧고 강렬하여 나는 나도 모르게 혀에 닿았던 그 단물을 자꾸만 곱씹고 또 곱씹게 된다. 하수구에서 뿜어져 나온 뿌연 김과 귀를 틀어막게 하던 정신없는 사이렌 소리도 내겐 모두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당당히 브로드웨이를 누비고 다닌 그때의 나는 어디 있는가. 콧속을 파고든 아찔한 뉴욕의 냄새를 찾아 나는 괜스레 기억의 골짜기를 들춰본다. 시차에 맞게 바뀌어 버린 사진 속 시간.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진이 주는 회귀의 범위는 이처럼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Excuse me, Sorry, Thank you

한국에선 나도 모르게 짜증과 불만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도 늘, 일상적으로 말이다. 나에게 짜증과 불만은 일상의 매 순간 속에 등장하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마치 샌드위치 속에 들어있는 햄과 치즈의 꼴처럼. ‘내가 진정 부정적인 사람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뉴욕을 여행할 때 나는 내 마음에 풍요로움이 넘치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단지 우리나라에 대한 혐오와 외국에 대한 선망이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하는 걸까?


내가 뉴욕에 ‘거주’ 하지 않고 ‘여행’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좋은 점만 보고, 듣고,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여행의 달콤함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결과 내가 지금 사는 이곳과 뉴욕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매너’였다. 뉴욕의 사람들은 ‘Excuse me’, ‘Sorry’, ‘Thank you’를 흔한 인사말처럼 달고 다닌다. 혼잡한 사람들 틈 속을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 할 때,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을 추월할 때,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신체와 접촉했을 때, 메뉴를 주문하고 계산을 마칠 때 등등. 여행 중엔 나도 그들에게 자연스레 동화되어 위의 말들을 자주 입 밖에 낸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지금 어떠한가? 모르는 사람의 발을 꾸욱 밟거나 한 것이 아니라면 당연한 듯 나의 어깨를, 등을, 팔을,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치고 지나간다. 그 행동에 뒤따르는 예의의 말 따윈 ‘당연히’ 없다! 그럼 나는 그런 사람들 뒤를 맹렬하게 노려보는 것밖엔 할 수가 없다. 내가 예민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당신들도 전철을 탔을 때 내리기도 전에 어깨를 밀치며 들어오는 사람에 의해 기분이 상한 적이 한두 번쯤은 꼭 있을 것이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세 문장이 우리나라에선 그저 사치다. Manner makes man.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이 말이 괜히 만들어졌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집 밖을 나서고부터 어쩔 수 없이 부대끼는 많은 사람에 의해 인상을 찌푸리곤 한다. 당연한 듯 나의 어깨를, 등을, 팔을, 다리를 치고 가는 사람들을 묵묵히 견뎌내곤 한다. 내 안에 잠재하던 짜증과 불만이 늘 그렇듯 나를 집어삼키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곤 한다.


좋은 매너는 사람을 감동받게 하고, 미소 짓게 한다. 보통 많은 사람이 식당이나 카페, 옷가게에 들어갔을 때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길을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면 조용히 웃어주던, 식당에 들어서면 “How are you?”라고 물어주던,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당연하듯 잡아주던 뉴욕 사람들. 나에게 이처럼 근사한 매너를 선사해준 뉴욕 사람들 덕분에 나는 지난 뉴욕 여행을 더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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