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떠나는 날

by 최다은
떠나는 날

어젯밤 미리 정리해놓은 옷가지들과 함께 조그만 방에 늘여놓은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열흘 동안 안락한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던 이곳도 안녕이다. 두툼한 카펫이 깔린 복도도, 삐걱- 나무판자 소리가 나던 아파트도, 쓰레기 냄새가 나던 분리수거 실도 모두 다 과거의 단편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짐을 다 챙기고, 마지막으로 스탠드 불을 끄자 방을 비추던 화사한 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마치 완전히 막을 내린 무대처럼. 묵직한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항시 주머니 깊숙한 곳에 들어있던 열쇠 또한 이제 없다.


떠나는 날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뉴욕의 소음에 익숙해진 터라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거리가 조용하게 느껴졌다. 브로드웨이를 지나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터미널에 금세 도착했다. 떠나기 전 목을 축이기 위해 나는 터미널 바로 앞 카페에 들어갔다. 어느 곳이든 그곳에서의 마지막 날이면 기분은 괜스레 싱숭생숭해진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같이 공존하는 것이다.



반쯤 비운 아이스 초코를 한 손에 든 채 나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터미널은 터미널답지 않게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내데스크에 가 JFK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어디에서 타는지 물었다. 안내데스크의 직원은 내가 있는 곳에서 왼쪽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기다리면 곧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올 것이라 말했다. 나는 무거운 캐리어를 위태롭게 휘어잡으며 그곳에서 곧 올 공항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혼자 앉아있는 나를 본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나는 JFK 공항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곳은 JFK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람은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 가보라고 했다. 나는 다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반대편을 향해 갔다. 그런데 과연 이곳이 맞는지 거리는 휑뎅그레할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야광조끼를 입은 사내에게 JFK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이곳에서 타는 게 맞는지를 물었다. 그는 이곳이 맞다며, 예약한 표를 보여 달라고 했다. 어플로 미리 예약해놓은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자 버스는 방금 전에 떠났으니 다음 버스를 기다리란다. 엉뚱한 곳에서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버스를 탈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비행 시각은 오후 2시, 아직 그리 촉박하지만은 않았다. 1시간이면 공항으로 갈 수 있겠지. 나는 느긋함을 가지고 터미널 근처 기념품샵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다시 터미널 앞에 가기 위해 문을 연 순간, 이럴 수가! 하늘에서 갑자기 무지막지한 장대비가 마구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리는 비는 그럭저럭 맞을만한 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산이 없는 그대로 빗속을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비를 쫄딱 맞은 생쥐 꼴이 된 나는 터미널 안에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좀처럼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까 그 사내에게 버스는 언제 오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생각지도 못한 비 소식에 사방의 도로가 막혔다고 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2시 30분이 다 되어가고 나는 초조해져만 갔다. 이대로 표값을 날리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한들 제시간에 도착할 확률은 낮았다. 비행기는 정확히 2시에 출발할 터.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터미널 앞에서 표류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나를 갉아먹는 초조함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비행기를 놓칠 것만 같은 생각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낸 버스에 급히 올라탄 나는 쉴 새 없이 대한항공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통화량이 많아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 메시지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지겨운 통화연결음 끝에 드디어 상담원과 연결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차분히 나의 상황을 상담원에게 털어놓았다. 상담원은 우선 빨리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는 게 최선이라며, 만일 비행기를 타지 못한 경우엔 발권을 취소하고 다음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이런 날벼락이 다 있나. 혹여라도 공항에 늦게 도착할까 봐 출발 4시간 전에 나온 나의 수고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릴 상황이었다.


끓는 물을 가스 불에 올리고 나온 사람처럼 나는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버스는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나는 버스에서 재빨리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납덩이같이 무거운 캐리어를 한 손에 들고뛰자니 숨은 턱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대한항공 카운터를 찾아 헤맸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1층에 대한항공 카운터가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가까스로 2층에 있는 대한항공 카운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막바지로 출국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다음번엔 일찍 오셔야 해요.” 그 순간만큼은 퉁명스러운 승무원의 말도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END가 아닌 AND

시작과 끝의 당연한 이치에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이 도시의 땅을 다시 밟기를 희망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발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거란 사실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나의 머릿속과 마음속은 회귀를 향한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로 복잡스러웠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름 모를 아줌마가 나의 공상을 일부러 방해라도 해야겠다는 듯 왼쪽 어깨를 세차게 밀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나는 내가 곧 한국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것인가? 소득 없는 물음을 가슴속으로만 그저 먹먹히 삼켜낼 뿐이었다.


벨트를 매고, 기내에 흘러나오는 안전 방송을 듣다 보면 또다시 나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에 숨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든 것엔 당연하게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시공간을 초월한 것만 같은 비행기 안에서 여러 묶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배경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좋든 싫든 삶 속에 벌어지는 수많은 반복을 맞이할 것이다. 시작과 끝, 만남과 헤어짐, 출발과 도착.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여행의 마지막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내 손으로 이룬 모든 기억과 기록들을 회고하며 말이다. 덜 익어 떫은맛이 나던 열매도 기어코 결실을 맺듯이, 언젠가 이가 시리도록 달콤한 단맛을 낼 날을 기다리며.

keyword
이전 11화조그만 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