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다

기대하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관계에 상처받는 나를 위한 첫 발걸음

by 최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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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로 했던 사람과의 약속이 취소되어 친구 J에게 그 서운함을 토로하고 있던 그때였다. J는 내게 “다은아, 너는 참 정이 많은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 “그런가?” 나는 무언가를 들킨 마음에 괜히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약속이 취소되는 일과 같이 사소하리만치 사소한 일도 쉽게 넘길 수 없는 사람. 나란 사람이 그렇다. 온다는 말에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방 한 칸을 내어줄 준비부터 하는 사람. 오지 않는다는 말에 하루 종일 싱숭생숭한 마음을 곱씹는 사람. 오래전부터 나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과 만나는 걸 좋아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같이 보낸 시간만큼 정을 쌓는 일.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사람들이 나를 찾는 만큼 나도 그들에게 시간을 쏟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만큼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 또한 빈번했다. 내가 내어준 만큼 상대가 내어주지 않으면 별의별 생각으로 제 혼자 끙끙 앓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가 내게 다소 모질게 굴어도 나는 좀처럼 그 사람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했다. 인연이라는 알량한 끈을 말이다. 나만 놓으면 끝나는 관계라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자연스레 내 곁을 하나 둘 떠나는 이들을 보며 오히려 나는 내 곁에 남아있는 이들을 지키려 더욱더 이를 악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왜?”라는 물음이 줄곧 내 머리를 떠나지 않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에 일일이 마음 쓰지 않고도 잘들 사는 듯했다. 그렇다고 이런 나를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혹여 나만 유난떠는 듯한 얘기를 들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으며, 굳이 그런 말을 들어 또 상처를 받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상처. 이제 상처라면 지긋지긋했다. 타인에게 함부로 기대하고 도리어 실망하는 바보 같은 짓거리를 이제는 정말이지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그런 나를 벗어던지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가급적 내가 먼저 나서서 약속을 잡지 않고, 다수가 포함된 모임이 잡히면 얼굴만 비추는 선택을 내렸다. 인맥이 좁은 탓에 나 홀로 굴에 틀어박혀도 나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탓에 오히려 마음은 더 편했다. 혼자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작업을 하고, 길을 걷고…. 하지만 겨울이라는 차가운 계절 때문인지 원체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 때문인지 막상 ‘진짜 혼자’가 되어보니 나는 진득한 고독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식당이나 카페에서 나누는 사무적인 대화가 아닌 이상 나의 입엔 언제나 무거운 거미줄이 쳐져있는 상태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일시적으로 채우곤 했지만, 그게 허전한 마음을 전부 채워주진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날 즈음 지겨운 겨울 끝에서 친구 J를 다시 만났다. 밥을 먹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묻는 지극히 평범한 만남이 이어졌다. 대화의 발단은 J가 잘 알고 있다고 이끈 카페 안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내가 너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네 생일도 있었고, 네가 요즘 생각이 많아 보여서 만나자고 했어.” J의 말에 나는 말없이 앞에 놓인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삼켜냈다. “혹시 요즘 무슨 일 있는 거야?” J의 물음을 들은 나는 곧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고민을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막상 입을 떼니 그 다음부터는 훨씬 수월하게 그녀에게 나의 진심을 전할 수가 있었다. J는 내가 꺼낸 긴 얘기를 다 듣고선 이해가 간다는 듯이 정답게 나의 두 눈을 맞추었다. “그랬구나. 사람마다 다 그런 때가 있는 것 같아.” 나는 그녀에게 내 고민을 들려줬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날카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사람한테 기대를 안 해. 다은이 너도 그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기대를 하는 일을 줄여봐. 그럼 그렇게 실망하는 일도 없을 거야.' 나는 J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확실히 사람한테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하는 일도, 상처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타인에게 기대함으로 상처 받지 않는 완벽한 해결 방법을 알지 못한다. 만날 때가 되었는데 연락이 뜸한 친구를 느낄 때, 나를 빼고 만난 친구들의 사진이 SNS에서 올라왔을 때, 약속을 잡고 밥 먹듯이 취소를 연발하는 친구를 마주할 때 등등…. 나에겐 참 별 거 아닌 게 별 거라서 속상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한 가지는 내가 타인에 의해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닌 온전히 나 혼자로서 바로 서고 싶다는 결심을 한 일이다. 혹 타인에 의해 실망할 일이 생겨도 스스로 중심을 잃지만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말랑말랑한 마음에 근육을 붙이는 일은 이토록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게 바로 ‘나’를 위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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