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키를 더욱 ‘콤플렉스’라고 생각하게 된 요인 중 제일 큰 요인은 아마도 ‘키 큰 여자는 여성스러움이란 단어와 거리가 멀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내 또래의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연스레 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걸리는 건 다름 아닌 나의 큰 키였다. 남자 친구를 사귀려고 해도 그 당시 남자애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는 타입은 귀여운 얼굴을 가진 ‘보통 키’의 여자아이였고, (그 당시 소녀시대 태연은 정말 인기가 많았다.) 실제로 그 당시 남자애들은 나보다 키가 작거나 비슷한 게 대부분이었으며, 보통은 자기보다 키 큰 여자를 여자 친구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나의 키를 얘기하는 것을 꺼리곤 했다. 만나기도 전에 나의 키 얘기를 들으면 호감도가 떨어지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 큰 여자는 여성스러움이랑 거리가 멀다고 인식하게 만든 것은 비단 남자애들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여자애들은 아닌 척하면서 키가 작은 것을 일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거나 나의 키를 부러워하는 듯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키의 귀여움을 은근슬쩍 어필하곤 했다. “다은이 키가 내 남자 친구 키면 딱 좋을 텐데.”라는 말은 내가 학창 시절 내내 들어온 단골 멘트였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우리나라 사회 속 미의 기준이 지금에 비해 더욱 획일화되어 있던 것도 있다. 굳이 과거로 가지 않아도 평소에 웹 서핑을 하다 보면 “키 큰 여자는 떡대가 장난 아니다.”, “키 큰 여자보다 작은 여자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라는 글을 볼 수 있는데 십 년 전이면 오죽했을까. 특히,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키 큰 여자에 대한 폄하를 계속해서 했던 것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여자애들과 같은 사이즈의 옷을 입기 위해 항상 마른 몸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나의 원래 발 사이즈보다 5~10mm나 작은 신발을 사서 신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사실 키 큰 여자가 여성스럽게 보이는 것은 작은 키 또는 평균 키의 여자들보다 힘든 것이 사실이긴 하다. 왜냐하면 키가 크면 당연히 골격이 클 수밖에 없고, 골격이 크면 사이즈가 클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구두 같은 경우도 맞는 발 사이즈로 사야 하는 건 고사하고, 또 맞는 걸 샀다고 해도 플랫 슈즈가 아닌 이상 구두 굽 cm 만큼 키가 늘어나기 때문에 구두 신는 걸 꺼리게 되는 것도 여성스러움이랑 먼 요건에 속하다고 볼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3cm 정도의 낮은 굽의 구두를 신어도 키 180cm가 넘어버린다.) 하지만 설령 키 큰 여자가 키 작은 여자보다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지적할 의무는 아무에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성스러움을 강요할 의무도 없다! 더욱이 키 큰 여자는 작은 키 또는 평균 키의 여자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을 분명 가지고 있다. 이하늬, 지지 하디드, 최소라, 켄달 제너…. 그녀들을 보면 느낄 수 있는 멋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20년 가까이 키 큰 여자로 살아온 내가 키가 크다는 사실을 지금껏 내내 저주하고만 살았을까? 그건 당연히 아니다. 내가 키가 큰 사실을 ‘콤플렉스’에서 ‘장점(강점)’으로 생각하게 된 시점은 아마 스무 살 때부터 일 것이다. 내가 스무 살 때부터는 다 같은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었고, 더군다나 남자 친구를 더 이상 같은 지역, 같은 학교에서 만나지(소개받지) 않아도 되었으며, 무엇보다 키 큰 여자에 대한 인식, 그러니까 미를 바라보는 기준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나 대학이란 곳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의 장이었다. 그곳에서 나의 큰 키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자유롭게 받아들여졌다. 대놓고 나의 키를 언급하는 (적어도 나의 키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드물었다. 그렇게 나는 조그만 어항 속에서 물결이 굽이치는 강으로 넘어간 물고기처럼 조금씩 활기를 찾을 수가 있었다.
강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넓은 바다로 넘어간 때는 단연 모델 준비를 한 시기였다. ‘키가 큰 것은 멋있는 것’이란 인식은 내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모델 준비를 하기 전에는 내 키가 커서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그저 원망스러웠다면, 모델 준비를 하기 시작한 후에는 내 키가 커서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인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나보다 키 큰 사람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키가 큰 것에 대한 자신감을 내뿜고 다녔다. 나와 그들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우러러보는 시선을 받거나 “저 사람들 모델 아니야?”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내 콤플렉스였던 큰 키를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살을 빼고, 옷을 그럴듯하게 입은 것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다 내 키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 그리고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나와 내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했다.